히타이트

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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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BC 1600경 히타이트 고왕국의 초기 왕들은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북부로 세력을 확장했고 바빌론을 공격하여 아모리테 왕조를 멸망시켰다. BC 1400경 설립된 히타이트 신왕국은 시리아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BC 1193경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은 해양민족을 포함한 대규모의 이민 때문으로 보인다.
히타이트의 상형문자판은 정치조직·사회구조·경제·종교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 히타이트의 왕은 최고 지배자, 군사 지도자, 재판관이었을 뿐 아니라 폭풍의 신의 지상 대리인이었고, 죽으면 신이 되었다. 히타이트 사회는 기본적으로 봉건적 농경사회였으며, 평민은 자유인이나 '장인'이었고, 노예가 있었다.

히타이트
히타이트

흑해 너머에 있는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히타이트인은 우선 아나톨리아 중부를 장악하여 하투스(지금의 보아즈쾨이)에 수도를 마련했다. 하투실리스 1세(BC 1650경~1620경 재위) 같은 히타이트 고(古)왕국의 초기 왕들은 힘을 규합하여 아나톨리아와 시리아 북부로 세력을 확장했다. 하투실리스의 손자인 무르실리스 1세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바빌론을 공격하여 이곳의 아모리테 왕조를 멸망시켰다(BC 1590경). 무르실리스가 죽은 뒤 일어난 권력투쟁은 BC 1530년경 텔리피누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된 텔리피누스 칙령을 통해 무법상태를 끝내고 왕위계승의 순서를 정하고 국가의 근본기강을 문란시키는 범죄를 다스릴 고등재판소로 판쿠스(귀족)를 임명했다.

텔리피누스 이후의 역사적 기록은 히타이트 신(新)왕국, 즉 히타이트 제국(BC 1400경~1200경)이 등장할 때까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히타이트 제국은 수필룰리우마스 1세의 재위(BC 1380경~1346경) 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수필룰리우마스는 아나톨리아 서남부에서 아르자와를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동남부의 미탄니 왕국과 싸웠으며 시리아에서 히타이트의 세력을 확립했다. 무와탈리스(BC 1320경~1294경 재위)는 이집트의 세티 1세, 람세스 2세와 시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1299년 오론테스 강변의 카데시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다. 람세스가 대승을 거두었다고 주장했으나, 승패는 가늠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히타이트는 16년 뒤 하투실리스 3세의 재위(BC 1275경~1250경) 동안에 이집트와 우호를 촉진하기 위해 평화협정, 상호방위조약, 왕조간 혼인을 맺었다. 히타이트 제국의 멸망(BC 1193경)은 급작스러운 것으로 해양민족을 포함한 대규모의 이민 때문으로 보인다. 제국의 심장부는 문맹상태의 프리기아인이 장악했지만 킬리키아와 시리아의 몇몇 영지는 이후 5세기 동안 히타이트적 일체감을 계속 유지하면서 정치적으로 여러 개의 소규모 독립공국과 도시국가로 발전했다. 이들은 점차 아시리아에 병합되어 BC 710년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던 이 신(新)히타이트의 마지막 흔적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보아즈쾨이(지금의 터키에 있음)에서 발견된 히타이트의 상형문자판은 정치조직·사회구조·경제·종교와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지니고 있다. 히타이트의 왕은 최고 지배자, 군사 지도자, 재판관이었을 뿐 아니라 폭풍의 신의 지상 대리인이었고, 죽음에 이르면 신이 되었다. 히타이트 사회는 기본적으로 봉건적 농경사회였으며, 평민은 자유인이나 '장인'이었고, 노예가 있었다. 아나톨리아는 금속, 특히 은과 철이 풍부했고 제국시대 동안에는 제철술을 발달시켜 철기시대의 막을 열었다.

히타이트의 종교는 아나톨리아의 토착신과 시리아와 후르리의 신들을 포괄하는 다신교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아직 확실히 알려진 것은 아니다. 제국시대 이전의 히타이트 문화에는 흙을 사용한 예술품이 드물지만, 제국시대에는 많은 석조품이 발견되었는데, 이 석조품들은 세련되지는 못했으나 매우 강한 인상의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이와 달리 후기 히타이트 여러 나라의 예술은 히타이트·시리아·아시리아, 때로는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모티프와 영향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