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함무라비

다른 표기 언어 Hammurabi
요약 테이블
출생 ?, 바빌론
사망 BC 1750
국적 바빌로니아

요약 현대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령으로 꼽히던 현존하는 법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제외한 자기 왕조의 다른 모든 왕들과 마찬가지로 함무라비는 암나눔 부족에 속하는 아모리족의 명칭을 사용했다. 그의 직계가족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아버지인 신 무발리트와 누이인 일타니, 큰아들이며 후계자인 삼수일루나 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함무라비는 주변의 강대국들과 대결하여 승리하므로써 대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함무라비의 정복의 유일한 동기가 메소포타미아의 통합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함무라비 시대의 불변하는 업적은 BC 3000년대초부터 남방에 머물러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무대를 북방으로 옮겨 이후 1,000년 이상 이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함무라비(Hammurabi)의 흉상
함무라비(Hammurabi)의 흉상

현대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령으로 꼽히던 현존하는 법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함무라비 법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제외한 자기 왕조의 다른 모든 왕들과 마찬가지로 함무라비는 암나눔 부족에 속하는 아모리족의 명칭을 사용했다.

그의 직계가족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아버지인 신 무발리트와 누이인 일타니, 큰아들이며 후계자인 삼수일루나 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BC 1792년 신 무발리트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을 때 함무라비는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당시 메소포타미아 왕실의 관계에 따라 왕국을 다스리는 데서 공식적인 직무를 이미 일부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에 바빌로니아 남부 전지역을 통치하던 라르사의 림 신이 바빌론과 라르사의 완충지역으로 기능하던 이신을 정복했다. 이후 림 신은 함무라비의 주된 경쟁자가 되었다.

함무라비의 치적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주로 그가 사용한 연호를 근거로 삼고 있다(당시의 연호는 왕이 지난 해나 연초에 수행한 중요한 일들을 따서 이름지었음). 그에 따르면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하던 전통적인 활동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신전과 성벽 및 공공건물을 건축·복원했으며, 운하를 팠고 왕국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한편 전쟁을 벌였다. 그의 건축활동을 기념하는 공식적인 비문들은 이런 사실을 확인해줄 뿐 의미있는 정보를 추가로 더 제공하지는 않는다.

함무라비가 물려받은 왕국은 그 규모와 위치, 군사력으로 하여 바빌로니아의 주요강대국의 하나가 되었다. 함무라비가 자기 뜻대로 세력균형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힘이 강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 외교문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어느 왕도 독보적인 힘을 갖지는 못한다.

'바빌론 사람' 함무라비는 10~15명의 왕을 거느리며 '라르사 사람' 림 신도 그렇다. '에슈눈나 사람' 이발피엘은…… 20명의 왕들을 거느린다."

함무라비는 자신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1가지 방향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다. 그것은 유프라테스 강의 치수사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관개농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지역 실정에 비추어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자연히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불리한 지점에 위치해 있는 라르사 왕국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책은 함무라비의 할아버지가 시작한 것이지만 그의 아버지 대에 가장 힘 있게 추진되어 부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함무라비 자신은 왕위에 오른 직후인 BC 1787년 이 사업에 착수하여 림 신이 지배하는 우루크(에렉)과 이신 등의 도시들을 정복하고 그 다음해 또다시 림 신과 충돌했다. 그러나 함무라비의 연호와 당대의 외교서한에 따르면, 1784년 함무라비가 군사작전의 방향을 서북방과 동방으로 바꿈으로써 이 싸움은 더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이후로는 20년 가까이 중요한 전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시기는 마리·아슈르·에슈눈나·바빌론·라르사 등 주요왕국들 사이의 동맹관계가 변화를 거듭한 것이 특징이었다. 함무라비는 이러한 불안정한 교착기를 틈타서 북쪽 변경의 몇몇 도시들을 요새화했다(BC 1776~68).

함무라비의 재위중 마지막 14년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얼룩진 시기였다.

BC 1764년 함무라비는 이란의 금속생산 지역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려고 하는 티그리스 강 동쪽의 강대국들인 아슈르·에슈눈나·엘람의 연합군을 상대했다. 그러나 BC 1763년 라르사의 림 신을 공격한 것은 함무라비가 주도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후자의 전쟁에 관해서는 상세한 내용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함무라비는 이전에 신 무발리트가 림 신을 상대로 사용했던 책략을 다시 사용하여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둑을 쌓아서 주요수로의 물을 막은 뒤 갑자기 둑을 터뜨려 엄청난 홍수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그대로 두어 적국 백성들의 주된 생활자원인 물 공급을 끊는 방식이었다(함무라비가 림 신을 꺾기 위해 이런 책략을 사용했다는 것은 BC 1760년 그가 유프라테스 강의 서쪽 지류에 운하를 재건하여 전쟁 전에 그 수로에 의지하여 살다가 유랑하게 된 주민들을 재정착하도록 한 데서 짐작할 수 있음). 림 신의 마지막 거점인 라르사에 대한 최종적인 포위전은 7개월간 지속되었다.

그 싸움은 함무라비의 승리를 결정짓는 마지막 단계였다.

BC 1762년 함무라비는 또다시 동방의 강대국들과 대결했다. 이 싸움이 그의 자위적인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세력균형의 변화에 대한 상대국들의 반발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BC 1761년 함무라비가 어떤 동기로 바빌론에서 유프라테스 강 상류 쪽으로 약 400㎞ 지점에 있는 그의 오랜 동맹국인 마리의 왕 짐릴림을 공격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2가지 설명이 가능한데 그것도 역시 치수권(治水權)을 둘러싼 분쟁이라고 보거나, 아니면 함무라비가 고대 근동의 육상무역의 교차로에 자리잡은 마리의 지리적 이점을 탐내어 그곳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년 후 함무라비는 3번째로 동방을 향해 출병해야 했다(BC 1757~55). 이 원정에서 또다시 수로를 막는 책략을 써서 에슈눈나를 결국 멸망시킨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승리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바빌로니아 본토와 동방 민족들 사이의 완충지대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그로부터 160년 후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카시트인도 아마 그 동방민족들 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짐). 그때문에 재위 말년의 마지막 2년 동안 함무라비는 방어요새를 구축하는 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했다. 이무렵 그는 병이 들었으며 BC 1750년 이미 통치를 맡고 있던 그의 아들 삼수일루나에게 짐을 떠넘기고 죽었다. 함무라비의 재위중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변화들은 작은 도시국가가 영토를 보유한 대국으로 변모하는 데 따른 새로운 상황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의 서한을 보면 그와 같은 변화를 세부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왕국의 일상적인 행정절차를 확립하는 데 그가 몸소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친히 개입하는 통치방식은 함무라비뿐만 아니라 다른 동시대 통치자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현대적 의미의 법전 형태는 아니지만 함무라비의 법령은 또한 정의로운 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관심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함무라비 법전). 그것은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이 늘 추구해온 이상이었다.

함무라비가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확립하지 못했던 것은 그의 직접 나서는 통치방식도 한 원인이겠지만 또한 재위 말년에 전적으로 전쟁에 매달려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효율적인 행정기구를 갖추지 못한 것은 그의 사후 그가 군사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들이 급속히 퇴색하게 된 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함무라비는 바빌로니아 남부를 정복했을 때 수세기 동안 내려온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자신을 생애중에 신격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신성한 왕권). 이는 그의 개인적인 결정에 따른 것으로 아마도 왕권의 본성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로써 그는 이후 왕권의 개념을 규정하게 되는 선례를 확립했다. 함무라비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특출한 중요성을 갖는다는 평가는 오랫동안 과장된 측면이 있다. 처음에 그 근거는 그의 법전이 발견된 데 있었으나 뒤이어 분량은 적지만 더 오래된 법령들이 발견되면서 최초의 열광은 훨씬 줄어들었다. 아울러 흔히 지적하듯이 함무라비 법전과 모세의 율법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도 이제는 직접적인 연관성의 증거라기보다는 공통의 유산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함무라비는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다시 단일한 통치권으로 통합했다는 평판을 듣는다. 그런 통합의 추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이는 특히 당대의 인장에 새겨진 주제라든가 아카드와 술기의 왕 사라곤 같은 인물들이 페르시아 만에서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통치했던 과거의 영광을 환기시켜주는 예언들의 결구에서 잘 나타나 있음) 함무라비의 정복의 유일한 동기가 메소포타미아의 통합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함무라비 시대의 불변하는 업적은 BC 3000년대초부터 남방에 머물러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무대를 북방으로 옮겨 이후 1,000년 이상 이어지게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