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발

변발

다른 표기 언어 剃頭辮髮 동의어 추계, 椎髻, 삭두, 索頭

요약 몽골족이 예로부터 변발을 했는데, 그들이 세운 원나라가 세력이 강대해지자 고려·페르시아·중국 일부에까지 이 풍습이 퍼졌다. 후두부만 남겨놓고 주변의 머리털을 깎아 나머지 모발을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렸다. 고려 때인 1272년 원에 갔던 세자 심이 변발에 호복 차림으로 돌아왔다. 이후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변발 풍습은 크게 확산되었다. 1352년 반원운동을 추진한 공민왕은 문화적 복속을 떨쳐버림으로써 고려왕실의 존주권을 재확립하기 위해 자신이 하고 있던 몽골식의 변발과 호복을 풀어버렸다. 1370년 사헌부의 요청에 의해 100여 년 동안 해온 변발과 호복을 버리고 복색을 새로 제정했으며, 1374년 호제 금지, 1388년 편발과 호립 금지를 통하여 몽골식으로 머리를 깎는 풍습을 금했다.

몽골 발음으로는 캐쿨(kekul 怯仇兒)이며, 편발(編髮)·승발(繩髮)·삭두(索頭)·피발(被髮)·추계(椎髻)라고도 한다. 〈한서 漢書〉 서남이전(西南夷傳)에는 서이(西夷)의 준곤명(이미지昆明)이 처음 편발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서 晉書〉 사이열전(四夷列傳)에는 토곡혼(吐谷渾)의 부인이, 또 〈남사 南史〉 이맥전(夷貊傳)에는 고창(高昌:新·省土·番)의 남자들이 변발을 했다고 한다.

북방민족으로는 몽골족이 예로부터 변발을 했는데, 그들이 세운 (元)나라가 세력이 강대해지자 그들의 지배하에 놓였던 고려·페르시아·중국 일부에까지 이 풍습이 퍼졌다.

후두부(後頭部)만 남겨놓고 주변의 머리털을 깎아 나머지 모발을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렸다. 고려시대인 1272년(원종 13) 혼인문제 때문에 원에 갔던 세자 심(諶:忠烈王)이 몽골 풍속에 따라 변발에 호복(胡服) 차림으로 돌아왔는데, 이를 처음 본 백성들이 매우 해괴하게 여겼으며, 또 이를 슬퍼하여 우는 자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본격화되고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서로간의 인적 왕래가 많아지자 변발 풍습은 크게 확산되었다.

1352년(공민왕 1) 반원운동을 추진한 공민왕은 자신이 하고 있던 몽골식의 변발과 호복을 감찰대부 이연종(李衍宗)의 간언에 따라 풀어버렸다. 이러한 행동은 원의 지배하에서 지속되어온 문화적 복속을 떨쳐버림으로써 고려왕실의 존주권(尊主權)을 재확립하려는 의도였다.

원의 간섭을 극복한 시기인 1370년 사헌부(司憲府)의 요청에 의해서 100여 년 동안 해온 변발과 호복을 버리고 복색을 새로 제정했으며, 1374년 호제(胡剃) 금지, 1388년 편발과 호립(胡笠) 금지를 통하여 몽골식으로 머리를 깎는 풍습을 금했다.

이후 변발 풍습은 없어졌으나 관례를 올리지 않은 사내나 시집가지 않은 여자가 머리를 따는 풍습은 그대로 유습(遺習)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대(淸代)의 중국에서는 남자가 12, 13세가 되면 후두부(後頭部)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의 두발을 깎아버리고 남은 후두부의 모발은 길게 길러서 3가닥으로 땋아 등 뒤로 늘어뜨렸다. 시대와 민족에 따라서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변발의 가장 대표적인 나라는 원과 청나라였다. 청 세조(世祖)는 중국을 정복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 후 1644년 체두변발령(剃頭辮髮令)을 내려 전 중국인에게 정복민인 만주족의 두발형을 하도록 강요했다.

청나라 한족의 변발을 나타낸 그림
청나라 한족의 변발을 나타낸 그림

그러나 저항이 거세자 일시 보류했다가 다음해 다시 영을 내려 위반자를 엄하게 처벌하기도 하여 이후로 변발은 일반적인 풍속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청나라말에 반청운동이 전개되면서 한족(漢族)은 장발(長髮)을 통해 청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후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때 단발령을 내림으로써 변발은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