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 예술

남아시아 예술

다른 표기 언어 South Asian arts

요약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의 문예·공연·시각 예술.

인종·언어·정치적으로 분열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도 인도 아대륙(亞大陸)의 대다수 힌두인들은 매우 오래된 문화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세련된 궁중문화와 비교적 퇴폐적이지 않은 민속 및 종족 관습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하여 복합적이고 매력있는 남아시아 예술을 형성했다.

힌두 경전들의 백과사전적 특성은 인도인들의 모든 생활이 종교적인 면모를 지니게 만들었고 이 점은 특히 예술에서 두드러진다. 〈푸라나 Purāṇas〉, 서사시〈마하바라타 Mahābhārata〉·〈라마야나 Rāmāyaṇa〉에 나오는 인기있는 신들인 비슈누와 시바의 신화는 구상예술과 극예술의 소재로 자주 쓰인다.

〈라마야나〉는 최초의 카비아(kāvya)로 여겨지며, 카비아는 칼리다사(Kalidasa)의 작품들에서 가장 잘 구사된 시 양식이다.

'라사'(rasa)는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카비아를 지을 때 시인은 독특한 라사(정취)를 전달하고 청중들로부터 상응한 라사를 유도해내야 한다. 타밀과 텔레구를 포함한 남부에서는 드라비다어로 된 생명력있는 작품들이 나왔고, 특히 7~9세기에 타밀의 알리바르(남인도 신비주의자들)나 나야나르(타밀의 시음악가들)의 봉헌시들이 대표적이다.

박티(bhakti:인격적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 사상도 북부에서 자신들의 토속적 언어로 시를 쓰게 만든 강력한 자극제였다. 툴시다스의 〈람차리타 Rāmcarita〉는 중세 후기 양식으로 쓴 뛰어난 작품이다. 이슬람 정복자들이 페르시아어를 소개한 것이 우르두어의 발전을 가져왔다. 우르두 시인들은 페르시아 전통을 따랐고 운율과 리듬이 매우 섬세한 사랑의 시 가잘(ghazal)을 특히 좋아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우르두 시인 무하마드 이크발, 인도에서는 벵골인으로 시인이며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민족시인으로 성장했다.

〈나티아샤스트라 Nātya-śāstra〉는 고전 춤과 연극에 대한 규칙들을 세웠다.

그중 가장 인기있는 양식이 나타카(nāṭaka), 즉 영웅담이었다. 14세기 이후 나타카는 바라나시의 〈람릴라 Rāmlῑla〉와 같은 인기 대중연극에 밀렸다. 그러나 고전연극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특히 라사식의 관념으로 남았다. 무용수와 배우들은 관중의 반응에 따라 자신들의 재능을 평가했다. 열광적인 관객들은 공연중에 자주 재연을 요청했고 공연자들은 이에 응했다. 춤은 춤의 수호신인 시바 나타라자의 파괴적인 탄다바 춤을 따라 추는 '탄다바'(tāṇḍava:격무), 시바의 배우자 파르바티를 본떠 보통여자들이 추는 '라시아'(lasya:부드러운 춤)가 있는데 타밀 나두에 보존되어 있는 고전적인 '바라타 나티암'(Bhārata Nāṭyam)은 라시아의 좋은 예이다.

인도 북부의 카타크, 케랄라의 '카타칼리'(Kathakāli)는 탄다바이다. 전통적으로 에는 반드시 음악을 곁들였는데 가수와 반주자들이 무용수들의 발동작 리듬을 따라간다. 따라서 모든 선두 무용수들은 통달한 음악가이기도 하여야 하는데 복잡한 인도 음악을 고려할 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라가(rāga:분위기)와 탈라(tāla:박자)에 근거하여 즉흥적으로 연주하며 이러한 부분이 악보로 정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전음악과 춤의 전통은 구루(guru:스승)에게서 제자로 전수되며 이때문에 지금도 높은 수준의 예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방의 '민속 오페라'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방식이 인도 영화에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민속전통은 불행히도 그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다.

남아시아 건축의 전통은 석조건물을 목재건축양식으로 지은 것으로 유명한 인도 동부와 서부의 불교 석굴 사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주(支柱)없이 사원을 처음 지은 것은 굽타 시대였다. 건축양식의 주된 차이는 높은 시카라(śikhara:'산 정상')가 사원 위로 우뚝 솟은 북부 양식과 고푸라(gopura:입구)가 중앙 시카라보다 높이 솟은 더 발전된 남부 양식 사이에서 볼 수 있다.

시카라와 고푸라는 신화에서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메루 산(山)을 나타낸다. 외부에는 조각과 얕은 부조(浮彫)가 가득 새겨져 있고, 다양하게 새긴 주제들을 통해 그 우주적 의미를 강조했다.

후기 마투라와 간다라의 불교 양식이 그러하듯 산치·바르후트·아마라바티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난간들은 초기 인도 조각의 자연주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인도 조각은 라사에 근거한 인도 고유의 시각을 갖고 있다. 즉 라사(시각예술이 일으키는 감정)는 정신적 향상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만신(萬神)의 신화에 의해 한없이 복잡해진 철학에 조응하여 발전한 인도의 예술전통에서는 사실주의나 해부학적 정확성이 거의 의미가 없었다. 더욱이 흔히 인도 예술의 고전시대라고 하는 굽타 시대에는 조형예술에도 엄격한 도상학을 적용하여 사실주의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다. 인물들은 초세간적 존재들의 숭고한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도록 정해진 구성비례에 따라 묘사되었다. 탄트라 불교는 인도 북동부의 복잡한 팔라 왕조의 청동조각에 자극을 주었다.

아잔타와 엘로라의 프레스코를 제외하면 초기 회화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회화는 무굴 제국 시대에 번성했다(무굴 회화). 당시 라지푸트파(派)는 페르시아-무굴 양식의 영향을 받았고 메와르파·코타파·분디파는 독창적이었다. 17세기의 바솔리파는 위의 유파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대담한 색감, 힘있는 선, 순박한 감정표현이 특징이었다. 18세기에 바솔리파는 쇠퇴하고 더욱 부드러운 색감과 서정적인 양식의 캉그라파가 대두했다. 델리술탄국과 구자라트·말와·데칸의 작은 술탄국들이 웅장한 모스크를 지으면서, 대체로 힌두 사원을 약탈해 얻은 토속 소재들을 많이 이용했다.

이슬람 건축이 페르시아 건축을 넘어선 것은 무굴 제국 시대뿐이었다. 페르시아와 인도 양식이 혼합된 첫번째 작품이 델리에 있는 후마윤의 대리석과 사암으로 만든 묘이다. 이 묘의 엄숙하고 장엄한 모습은 웅장한 타지마할의 선구가 되었다. 악바르의 아그라 요새와 파테푸르시크리 시(市)는 무굴 시대에 세속 건축 기술이 잘 조화된 가장 좋은 예이다.

불교국인 스리랑카의 예술도 인도 아대륙과 보조를 맞추었다.

6세기 시기리야의 아름다운 프레스코는 당시 인도회화의 자연주의를 모방했고 칸디아의 무용극은 카타크 전통을 이어 품위가 있었다. 그러나 실론의 악마춤에는 불교도입 이전의 전통이 강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바의 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도의 어떤 예술 장르들은 인도에서 소멸된 뒤에도 이곳에서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종 모양의 탑인 스투파(stupa) 또는 다고바(dagoba)는 스리랑카에서 인도의 불교건축술이 독창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인도 건축, 인도 문학, 인도 미술, 인도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