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령전

조선향토대백과 유물유적정보관 : 유적

숭령전

[ 崇靈殿 ]

분류 유물유적정보관>유적>사찰 · 사당>사당
유물유적시대 조선
행정구역 평양시>중구역>종로동
등급 국보급
지정번호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호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평양학생소년궁전 옆에 있는 조선 중기의 사당건물. 1977년 숭인전이 곁으로 옮겨와 숭인전과 나란히 있게 되었다. 숭령전을 처음 세운 것은 1429년이다. 원래 이 건물은 고조선의 창건자이며 한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을 제사지내던 사당집이었다. 후에 단군의 사당에서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15세기 초엽부터이다. 『세종실록』에는 1429년에 단군사당을 세우고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고 쓰여 있다. 그 전에 흔히 ‘단군사’, ‘단군전’이라고 불러오던 것이 단군과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되면서 1725년부터 숭령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세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숭령전은 본래 본채와 동쪽행랑 3칸, 서쪽행랑 2칸, 대문 3칸과 동서 좌우에 달린 좁은 문각 1칸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시기에 대부분 파괴되고 본채와 대문만 남게 되었다. 6 · 25전쟁시기 폭격으로 심히 파손된 것을 전후에 원상대로 복구하였다. 숭령전의 본채는 정면 4칸(12.88m), 측면 3칸(9.17m)으로 되었다. 숭령전은 비탈진 언덕 중턱에 터를 닦고 그 위에 세웠다. 밑단의 높이는 1.15m이다. 밑단 위에는 바깥에 14개, 안에 6개의 흘림기둥을 세우고 3포식 두공을 얹었다. 지붕은 겹처마의 합각지붕으로서 집채와 잘 어울려 건물을 한결 보기 좋게 해주고 있다.

숭령전의 구조에서 특징의 하나는 정면 칸수를 짝수로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옛 건축에서는 건물의 정면칸수를 홀수로 하는데 숭령전에서는 짝수 즉 4칸으로 하였다. 그것은 단군과 동명왕을 함께 제사하게 되는 건물의 사명으로부터 출발하여 단군제단은 서쪽 2칸에, 동명왕제단은 동쪽 2칸에 동등하게 갈라놓은 데서 생긴 것 같다. 숭령전의 구조에서 특징의 다른 하나는 건물의 규모에 비하여 간략화된 두공을 쓴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기로 내려오면서 두공이 포수가 많아지고 복잡해지는데 이 건물에서는 3포짜리 포식 두공을 썼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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