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제명

현제명

[ 玄濟明 ]

요약 성악가(테너)·작곡가. 서울대 음대 교수. 호는 현석(玄石). 경북 대구(大邱) 출생.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및 미국 시카고음악대학 졸업. 연희전문(延禧專門) 교수.
출생 - 사망 1902년 ~ 1960년
현제명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교회음악을 통해 음악의 세계에 들어갔다.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1923년 숭실전문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전주(全州) 신흥중학교 음악교사를 역임할 때 전주 출신의 양신선(梁信善)과 결혼하였다. 1924년 10월 20일 전선남녀전문학교 연합음악회 때 출연하였다.

1925년 미국 시카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School)에 입학했다가 인디애나주에 있는 건음악학교(Glun Music School)로 옮겨 1년간 수학했다. 귀국 후 1928년 연희전문 음악 주임교수였던 김영환(金永煥)의 뒤를 이어 1929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 영어교수로 있으면서 그해 9월 연희전문 음악부장으로 부임해 음악부의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만들어 음악보급에 힘썼다. 1929년 귀국독창회를 비롯해 1930년대에는 성악가로 활약하였다.

1929년 공회당에서 2월 27일 귀국독창회를 열었으며, 이때 자작곡인 "석양"(夕陽: 후에 "고향생각")을 노래 불렀다. 1929년부터 발매된 빅타음반에 창작 가곡 및 외국 가곡을 취입했다. 1930년 2월 11일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가 창립됐을 때 이사 홍난파·김영환·채동선·안기영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11월 15일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의 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31년 5월 『현제명가곡집』 제1집을 출간했고, 1932년 조선음악가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937년 재차 도미하여 모교로부터 음악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3년 홍난파(洪蘭坡)와 함께 작곡발표회(作曲發表會) 개최했으며. 6월 22일 『현제명작곡집』 제2집이 발간되었다.

현제명 본문 이미지 1

1933년 10월 10일 현제명·홍난파작곡발표회 때 자작곡 "가고파"·"뱃노래"·"이 마음"·"그집 앞"·"산에 올라"·"새가 되어 배가 되어"·"소경되어 지이다"·"진달래"를 발표했다. 1933년 이화여전 강당에서 홍난파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2인작품발표회를 가짐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갖가지 군국가요(軍國歌謠)가 발표되던 1937년 9월 26일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라디오를 통해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에 의한 군가 "정도(征途)를 전송하는 노래"와 이종태(李鍾泰) 작곡의 "방호단가" 및 이면상(李冕相) 작곡의 "정의의 스승이여"를, 그리고 같은 해 11월 7일에는 전국 중계방송으로 "전장의 가을"(일본어)·"조선청년가"(일본어) 및 "반도 의용대"(조선어)를 방송하였다. 1939년 경성방송국이 편찬한 『가정가요』 제1집에 "산에 들에"와 "눈오는 밤"이 실려 있다. 전조선창작발표연주회(全朝鮮創作發表演奏會) 때 출품하였다.

1940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야" 공연 때 테너 독창자로 초빙되어 무대에 섰다. 1940년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따른 창씨개명(創氏改名) 때 구로야마 사이민(玄山濟明)으로 바꾸었다.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1941)의 이사 중 한 사람. 계정식·김관·김원복·김재훈·함화진, 이상 다섯 명의 조선인 이사와 함께 활동하였다.

1942년 조직된 후생실내악단(厚生室內樂團)의 대표였다. 1943년 3월 26일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과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 공동주최 음악회 때 출연했고, 1943년 국민가창운동정신대(國民歌唱運動挺身隊) 산하의 가창지도대의 지휘자로 순회공연에 나섰으며, 국민개창운동(國民皆唱運動)의 음악지도자로 지방에 파견되었다.

1944년에 재편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의 이사장을 역임한 그는 김원복·윤기선·이흥렬·정희석·이규용·나운영·정영재·김영애·이종태 이상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빅타음반과 콜럼비아레코드에 자작 가곡과 이탈리아 가곡 등을 취입했다. 그가 작곡한 "절름발이" 및 콜럼비아관현악단 반주로 취입한 "고향생각"·"나물캐는 처녀"·"내 너를 떠나"·"내 말 전해 다오"·"니나" 등의 여러 노래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그가 작사·작곡한 "달밤" 및 일본 빅타관현악단 반주로 취입한 "달밤"·"마레카아레"·"산 속의 집으로"·"주의 곁으로 인도하심"·"평안히 쉼"은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현재명 관련 기사 또는 그가 발표한 글은 『別乾坤』(1930) 32호, 『東光』(1931) 22호, 『三千里』(1932) 4권 2호, 『三千里』(1932) 4권 7호, 『別乾坤』(1933) 66호, 『別乾坤』 67호, 『中央』(1934) 8호, 『三千里』(1934) 6권 9호, 『中央』(1934) 8호, 『三千里』(1935) 7권 1호, 『朝光』(1936) 6호, 『朝光』(1936) 3호, 『朝光』(1936) 9호, 『朝光』(1937) 18호, 『女性』(1937) 2권 5호, 『朝光』(1937) 19호, 『新家庭』(1933) 1권 1호, 『新家庭』 1권 2호, 『新家庭』 1권 3호, 『新家庭』 1권 4호, 『新家庭』(1933) 2권 11호, 『新東亞』(1933) 15호, 『新家庭』(1935) 3권 8호, 『藝術』(1935) 1권 3호, 『三千里』(1935) 7권 11호, 『三千里』(1936) 8권 1호, 『新家庭』(1936) 4권 1호, 『연희시은』(1936) 4호, 『三千里』(1941) 13권 4호 등에 나온다.

해방 후 1945년 고려교향악단(高麗交響樂團)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1948년까지 운영했다. 1945년 경성음악전문학교(京城音樂專門學校)를 설립했으며, 1946년 김관수·김성태·김생려 등과 함께 서울교향악협회를 조직했다. 그해 2월 9일 경성음악전문학교가 창설됐을 때 교장이었다. 이 경성음악학교는 국립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되었다가 1952년 음악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 9월 16일 우익 음악가들로 결성된 고려교향협회(高麗交響協會)의 이사장이었다. 1948년 5월 설립된 한국음악원(韓國音樂院)의 이사장이었으며, 1949년 9월에 결성된 대한음악가협회(大韓音樂家協會)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9년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지휘했다. 1950년 2월 29일에 결성된 대한음악협회(大韓音樂協會)의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5월 현제명의 창작오페라 춘향전 공연 때 지휘했고, 1951년 7월 대구와 인천에서 오페라 춘향전을 지휘했다. 1954년 11월 그의 창작 오페라 "왕자호동"이 공연되었다. 1955년 가곡 "고향생각"·"그 집 앞"·"산들바람"·"희망의 나라로"·"온 누리는 꿈속에 잠겨 있고"·"한 번을 보아도 내 사랑"·"동편 하늘 밝아 온다"·"그리워 그리워"가 『한국가곡집』(1955)에 수록되었다.

1955년 제1회 예술원상 수상했다. 1956년 6월 15일 창립된 한국음악교육연합회의 의장이 됐으며, 1958년 5월 25일 결성된 창악회(創樂會)의 고문을 역임했다. 1958년 오페라 "왕자호동"을 작곡했다. 1958년 7월 오페라 춘향전이 공연됐으며, 1965년 11월 및 1970년 10월 그의 오페라 춘향전이 공연되었다.

작품으로 "가고파"·"고향생각"·"희망의 나라로" 등이 있다. 작품집으로 『현제명작곡집』 제1집(1931)과 제2집(1933) 등이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오페라 춘향전을 1949년에 초연했다. "왕자호동"(1954) 외에 가곡 "고향생각"·"희망의 나라"·"산들바람"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957~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