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태

이종태

[ 李鍾泰 ]

요약 작곡가·지휘자. 일본음악고등사범학교(日本音樂高等師範學校) 졸업.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재직.
출생 1905년

1934년 (京城放送管絃樂團)의 출범 때 지휘했고, 1942년 후생실내악단(厚生室內樂團) 조직됐을 때 구성원이었다. 일본에서 작곡을 전공했고, 『白頭山』(1930) 1호에 "음악가의 조상"을 발표했다. 1934년 당시 29세의 그는 에 재직하면서 의 지휘를 담당했다고 『三千里』(1934) 6권 9호에 발표한 한양화랑(漢陽花郞)의 "樂壇 메리-그라운드"에 소개되었다.

(金德奎)가 채가(採歌)하고 그가 채보(採譜)한 "자장가" 및 송석하(宋錫夏)가 채가(採歌)하고 그가 채보한 "남선 이앙가"(南鮮移秧歌)의 오선보는 『朝鮮民俗』(1934) 2호에 발표되었다. "예술(藝術)에 대한 나의 의견(意見)"을 『四海公論』(1935) 1권 1호에 발표했다. 그가 작곡하고 지도한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 아동들이 취입학 곡은 오케음반에 전한다.

1938~1940년 그가 지휘한 이화여전(梨花女專) 민요연구부(民謠研究部)의 여성합창 ""·""·""·""·"춘비춘흥"(春悲春興)·"화란춘성"(花爛春城)·"" 방송을 위해 (京城放送局)에 출연했다. 갖가지 군국가요(軍國歌謠)가 발표되던 1937년 9월 26일 경성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그가 작곡한 "방호단가"를 이 방송하였다.

1938년 1월 4일 이왕직(李王職)의 촉탁으로 양악보(洋樂譜) 채보에 공헌했다. 오케음반에 유행가 여섯 곡을 작곡하였다. 1940년 1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시국과 음악"이라는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1년 3월 25일 설립된 (朝鮮音樂協會)의 이사 14명 중 한국인 이사 ··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44년에 재편성된 (京城厚生室內樂團)의 단원인 그는 이사장 현제명(玄濟明) 아래 ······· 이상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7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