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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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冕相 ]

요약 작곡가(유행가·신민요). 함경남도 함주 출생. 필명은 이운정. 빅타 문예부장. 일본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 졸업. 평양음악대학(平壤音樂大學) 총장(1957). 작곡가동맹 위원장.
출생 - 사망 1908년 ~ 1989년
이면상

1923년 함흥사범학교를 다닐 때부터 음악을 익히기 시작한 그는 1925년 졸업 후 원산제2보통학교의 교원생활을 하면서 창작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동요곡을 작곡했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光州學生事件)의 불이 원산에 파급됐을 때 교단에서 쫓겨나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사시노(武藏野)음대에 입학하여 가요 "들국화"를 작곡하였다.

재학시절 학교의 피아노를 몰래 사용하다가 피아노도용자라는 죄목으로 무사시노음대에서 퇴학당한 후 일본고등음악학교(日本高等音樂學校)에 들어가 졸업할 무렵 일본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의 세키 아키코라는 음악가가 그의 "들국화"를 일본말로 번역하여 작곡발표회에 내놓게 했다. 이 노래는 채규엽(蔡奎燁)의 노래로 레코드에 취입되었다.

1927년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의 가요정화운동(歌謠淨化運動)에 참여하여 "종군 간호부의 노래"·"정의의 수"·"총후의남" 등의 친일가요(親日歌謠)를 작곡했다. 1931년 일본 동경음악학교 고등사범부에서 2년간 수학하는 동안 그는 일본 무산계급음악동맹(無産階級音樂同盟)에 가맹해 활동했다. 1933년 귀국 후에는 폴리돌레코드사와 빅타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로 지내면서 신민요와 작곡가(유행가)로 활동하였다.

1933년 귀국 후 폴리돌사의 전속작곡가(專屬作曲家)로 있으면서 신민요 "꽃을 잡고"(김안서 작사)를 작곡하여 선우일선(鮮于一扇)의 노래로 레코드에 취입했다. 이어 "울산타령"(현재 우리의 동해는 좋기도 하지)·"뻐꾹새"(창작 당시의 포곡성)를 비롯해 "가야금야곡"·"금송아지타령"·"그네 뛰는 처녀"·"남포의 추억"·"무정세월"·"섬색시" 등 수십 편의 신민요(新民謠)를 작곡했으며, "진주라 천리길"·"연자방아" 등의 대중가요를 창작하였다.

1934년 피아노로 신민요 방송을 위해 경성방송국에 출연했다. 그가 작곡한 "넷(옛) 산성"·"님의 배"·"종군간호부의 노래" 등의 여러 유행가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1930년대 빅타음반 및 폴리돌음반에 취입한 신민요 7곡을 작곡했고, 신민요의 작곡가로도 유명하고, 콜럼비아음반과 폴리돌음반에 10여 곡의 유행가를 작곡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유행가 "청춘을 찾아서"와 신민요 "울산 아가씨"·"봄맞이 아리랑" 등은 폴리돌음반에 취입되었다.

1937년부터 빅타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로 옮겨 "진주라 천리길" 등의 유행가로 인기를 얻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전장의 가을"·"종군간호부의 노래" 등의 친일가요를 작곡했으며, 1941년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의 국민가요 작곡가로 활동했다. 갖가지 군국가요(軍國歌謠)가 발표되던 1937년 9월 26일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 라디오를 통해 그가 작곡한 "정의의 스승이여"를 현제명(玄濟明)이 방송하였다. 1936년 4월호 『음악평론』에서 박태준·김준영·김세형 등과 함께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1937년 2월 홍난파가 지휘한 경성필하모니오케스트라에서 김태연·김재호(金載鎬)·이승용(李承用)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했다고 『三千里』(1934) 6권 9호에 발표한 한양화랑(漢陽花郞)의 "樂壇 메리-그라운드"에 소개됐고, 구완회·왕평·박영호·방희택(方熙宅)과 함께 가진 "레코드계의 내막을 듣는 좌담회"는 『朝光』(1939) 41호에 게재되었다.

일제강점기 그가 작곡한 "물레방아"·"변할 수 잇나요"·"상사단장"(相思斷腸)을 포함한 10여 곡의 유행가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하고, 그가 작곡한 "가을의 황혼"·"강남처녀"·"개나리타령" 등 20여 곡의 유행가 및 향토민요는 폴리돌관현악단 반주로 취입됐다. 콜럼비아음반에 유행가 여섯 곡을, 그리고 폴리돌음반에 다섯 곡을 작곡하였다.

1945년 8·15해방 이후 함경남도 음악동맹 위원장을 시작으로 1946년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 및 문학예술총동맹중앙위 상무위원을 거쳐 1946년 5월 평양에서 열린 북조선예술인대회에 참가한 후 가요 "빛나는 조국"(박세영 작사)·"승리의 5월"·"산으로 바다로 가자"(김조규 작사)를 작곡했다.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다. 그 후 "조국보위의 노래"(조영출 작사)·"문경고개"(조기천 작사)에 이어 1952년 "내 고향의 정든 집" 등을 작곡했고, 1953년 "건설의 노래"(조영출 작사)·"우리는 승리했네"(석팔봉 작사)·"영광의 땅 보천보" 등을 작곡했다.

1951년 음악가동맹 중앙위 위원장, 1953년 작곡가동맹중앙위 위원장, 1956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 겸 상임위원, 1957년 평양음악대학 총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1년 음악동맹중앙위원장 등, 1962년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 1969년 음악가동맹 위원장, 1970년 노동당 중앙위원(제5차대회), 1972년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1979년 음악가동맹 위원장, 작곡가동맹 위원장, 1980년 노동당 중앙위원, 1982년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 1986년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등을 지냈다.

1955년 공훈예술가, 1959년 "밀림아 이야기하라"로 인민상을 받았고, 1961년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1971년 혁명가극 "피바다"와 "밀림아 이야기하라"의 창작에 끼친 공로로 1972년 김일성상을 받았고, 1985년 김일성 훈장에 이어 1988년 80돌 때 『이면상작곡집』을 출간하였다.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의 한 장면

혁명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의 한 장면

혁명가극 "피바다"의 한 장면

혁명가극 "피바다"의 한 장면

작품으로 "우리는 승리했네"(1954)·"아, 수령님 품이여"(1970)·"조국 보위의 노래"(1975) 등이 있고, 작품집으로 동요작곡집 『은방울』(일제시대)·『리면상가요곡선집』(1957)·『문경고개』(1974)가 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633~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