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홍난파

[ 洪蘭坡 ]

요약 바이올린 연주가·작곡가.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 교수.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南陽邑) 활초리 출생. 본명은 홍영후, 필명은 나소운.
출생 - 사망 1898년 ~ 1941년
홍난파

보통학교를 마치고 1909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음악공부에 전념했다. 1911년 14세 때 구입한 바이올린을 가지고 독학하다가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 들어가 김인식(金仁湜) 선생의 지도로 본격적인 바이올린 공부를 시작했다. 1912년 YMCA중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정악전습소의 서양악부(西洋樂部)를 졸업하였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성악과(聲樂科) 2기생으로 졸업하자, 다시 바이올린과에 들어가 김인식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5년 졸업과 동시에 모교에서 바이올린 교사로 일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7년 『조선구악보』(朝鮮舊樂譜) 제1·2·3편을 광익서관(廣益書館)에서 간행했다. 1917년까지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洋樂部)의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를 그만두고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포기하고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 현 동경예술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19년 10월 13일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 창립음악회 때 출연했다. 1920년 김형준(金亨俊)이 작사한 "봉숭아"를 작곡하였다. 그해 12월 19일 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음악회 때 출연하였다. 일본 유학시절인 1919년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이름으로 음악·미술·문학의 3종 예술의 주체로 한 순예술잡지 『삼광』(三光)을 창간하여 편집인·발행인을 역임했다. 귀국 후 음악 창작과 연주·교육·평론활동을 전개하면서 1920년 첫 작품 "애수"를 창작했다. 그 후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봉선화"라는 곡명을 붙였다.

1920년에 단편소설집 『처녀혼』(處女魂)을 썼고, 1923년에는 장편소설 『폭풍을 지난 뒤』를 발표하여 문학적 재질을 과시하였다. 1922년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研樂會)를 창설해 작곡 및 연주활동과 평론활동을 시작하고, 그 기관지로 『음악계』(音樂界)라는 음악잡지를 창간했다. 이 『음악계』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다.

1923년 7월 9일 동정음악회 때, 그리고 10월 18일 묘동찬양대의 음악대회 때 출연했다. 1924년 1월 19일 YMCA강당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1924년 "애수의 조선"을 비롯하여 "하야의 성군"·"로맨스"·"라단조 가보테" 등의 바이올린 독주곡을 발표했고, 5월 11일 연희전문음악회 때 출연했으며, 6월 14일 경성의전(京城醫專) 음악부의 음악회 때 출연하였다.

홍난파 작곡의 바이올린 로만스(이진원 제공)

홍난파 작곡의 바이올린 로만스(이진원 제공)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저로 발행하였다. 1925년 2월 7일 중앙기독소년부(中央基督少年部) 주최 신춘음악회 때 출연했고, 4월 28일 음악잡지 『음악계』를 출간했다. 그해 9월 26일 연악회 주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 1925년 10월 12일 중앙기독청년회(中央基督靑年會) 주최 추기음악회 때, 11월 19일 서울야구구락부 주최 음악회 때, 그리고 12월 11일 조선학생회 주최 제2회 음악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봉선화"에 이어 "성불사의 밤"·"그리움"·"옛 동산에 올라"·"사공의 노래"·"봄처녀"·"사랑" 등을 창작했다. 1920년대 중엽부터 동요창작에 열중하여 "고향의 봄"·"해바라기"·"할미꽃"·"웃음"·"병정나팔"·"엄마생각"·"옥토끼"·"무지개" 등을 발표했으며, 1920년 대 말엽에 "금강에 살으리랏다"·"봄처녀"를 발표하였다.

1926년 1월 30일 인천유성회 주최 신춘음악회 때, 그리고 2월 10일 제5회 신춘음악회 때 출연했고, 2월 5일 우리소년회 주최 신춘음악회 때, 그리고 7월 21일 정칙강습원(正則講習院) 주최 하기강습회 때 출연했으며, 11월 『조선동요백곡집』(朝鮮童謠百曲集)을 출간했다.

『조선가요작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우리양악100년』)

『조선가요작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우리양악100년』)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에 입학했고, 1927년 동경시교향악단(東京市交響樂團, NHK교향악단의 전신)의 제1 바이올린 주자가 되었다. 1926년에 설립한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의 창단멤버 중 한 사람인 그는 우리나라 최초 관현악단인 중앙악우회에서 부츠 여사를 비롯해 박경호·홍재유·최호영·이영세·안병소·고봉경·홍지유·곽정순·김재호와 함께 매주 1회씩 현재의 YMCA 전신인 기독청년회관에서 연습하여 1928년 3월 3일 창단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29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가 됐고, 50편의 창작 동요를 수록한 『조선동요백곡집』 상권을 간행하였다. 1930년 2월 11일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의 창립 때 이사장 현제명, 이사 김영환·채동선·안기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0년 6월 『음악과 시』에 발표한 신고송(申孤松)의 "음악과 대중"이라는 글에 대하여 "음악에는 계급의식이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함으로써 음악의 계급론과 관련된 신고송과 논쟁을 벌였다. 신고송의 민중음악론에 대하여 그는 순수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는 관현악곡인 "관현악 조곡"을, 1939년 독창이 붙은 관현악곡 "나그네의 마음"을 작곡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의 서우드음악대학에서 연구하고 1933년 귀국하여 이화여전(梨花女專) 및 경성보육학교(京城保育學校) 음악교수로 지내면서 우리나라 첫 실내악단인 난파트리오라는 기악3중주단(홍난파·이영세·홍성유)을 조직했다. 그 후 이화여전 강사 시절 홍성유·이영세 등과 함께 실내악의 연주활동을 전개했다. 1929년부터 일본빅타축음기주식회사가 발매하기 시작한 조선음반에는 그의 "봉선화"·"퐁당퐁당"·"햇빛은 쨍쨍" 등이 취입됐다. 1920년대 가장 많이 동요를 작곡한 사람인 그는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권을 출간했다. 1934년 빅타레코드사의 음악고문이 되었다.

홍난파 작곡의 봉숭아(『우리양악100년』)

홍난파 작곡의 봉숭아(『우리양악100년』)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京城中央放送局)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방송관현악단(京城放送管絃樂團)을 조직해 지휘자로 활약했다.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京城音樂專門學校) 교수로 취임했다. 1938년 성서트리오라는 실내악단(홍난파·김태연·이흥렬)을 조직했다. 1939년 6월 8~9일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창작발표회 때 관현악곡 "즉흥곡"을 비롯한 "동양풍의 무곡"·"작은 론도" 등의 기악곡 및 성악곡 "고향생각"·"옛동산에 올라"·"입담은 꽃봉오리"·"사랑"·"관덕정"·"그리움"·"금강에 살으리랐다"를 발표했다.

1939년 편찬한 『가정가요』 제1집에 그의 작품 "산에 들에"가 실려 있다. 1940년 7월 7일자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했다. 1941년 3월 25일 설립된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의 이사 14명 중 조선인 이사 함화진·김관·계정식·김원복·김재훈 및 평의원 김세형·이애내·임동혁·이종태·장인식·노창성·김영환·김매리와 함께 활동하다가 1941년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홍난파의 『음악만필』의 표지(『우리양악100년』)

홍난파의 『음악만필』의 표지(『우리양악100년』)

일본축음기주식회사의 일축음반(日蓄音盤: K589, K634, 648K)에 "미뉴엣 무도곡"·"도레미파"·"속임"·"아이 재우는 소리"·"애수의 조선"을 바이올린 반주 또는 바이올린 독주로 취입한 양악(洋樂)의 선구자이다. 콜럼비아음반·일축음반(日蓄音盤)·빅타음반에 취입한 그의 동요 "도레미파"·"병정나팔"·"장미꽃"·"해바라기"의 작사자이다. 콜럼비아음반·빅타음반·일축음반에 취입된 그의 동요는 "가을바람"·"가을밤"·"개고리"를 포함한 40여 곡이다. 그가 작곡한 동요의 작사자는 김광윤·김귀환·김수향 등 20여 명이다.

일제강점기 그가 바이올린 반주로 취입한 동요("할미꽃"·"춤추세"·"속임"·"도레미파"·"아기 재우는 소리")·바이올린 곡·"애수의 조선"·조선정악·피아노곡 및 연악회가 연주한 "잔도도리"는 일축조선소리반(盤)에 전한다. 김영의·이경숙·최명숙과 함께 취입한 "검둥병아리"·"고별의 노래"·"나뭇잎"·"녹슨 가락지" 등, 그가 바이올린으로 독주한 "애수의 조선," 그리고 그가 작곡한 "가을바람"·"가을밤"·"고향의 봄"·"고향하늘"·"낮에 나온 반달"·"달마중"을 포함한 30여 곡의 동요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그가 작곡한 "개고리"·"꽃밭"·"눈, 꽃, 새"·"뱃사공"·"병아리"·"병정나팔"·"봉선화"·"할머니 편지"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한다. 그가 취입한 바이올린 독주·"미뉴엣 무용곡"·취주악 및 피아노 반주로 취입한 "도레미파"·"속임"·"아기 재우는 노래"·"춤추세"·"할미꽃," 그리고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곡 "애수의 조선"은 『조선레코드총목록』에 전한다.

현재도 애창되는 창작동요로 "고향의 봄"(이원수 작사)·"개구리"(이동찬 작사)·"낮에 나온 반달"(윤석중 작사)·"달맞이"(윤석중 작사)·"도레미화"(홍난파 작사)·"병정나팔"(홍난파 작사)·"하모니카"(윤복진 작사)·"햇볕은 쨍쨍"(최옥란 작사) 등이 있다.

홍난파 관련의 기사나 그의 작품은 『開闢』(1923) 31호와 32호, 『新女性』(1924) 6호, 『新女性』(1924) 2권 12호, 『學生』(1930) 2권 3호, 『協實』(1930) 2호, 『어린이』(1930) 8권 7호, 『別乾坤』(1930) 32호, 『東光』(1931) 22호, 『東光』(1931) 17호와 19호, 『靑年』(1931) 11권 3호, 『東光』(1931) 28호, 『東光』(1932) 36호, 『東光』(1931) 22호, 『新家庭』(1934) 2권 11호와 12호, 『中央』(1934) 8호, 『三千里』(1934) 6권 9호, 『三千里』(1935) 7월 9호, 『女性』(1936) 1권 1호, 『少年』(1937) 1권 1호, 『新世紀』(1939) 1권 1호, 『三千里』(1939) 11권 4호, 『朝光』(1939) 43호, 『가정의우』(1939) 21호, 『춘추』(1941) 9호 등에 나온다.

그가 발표한 글은 『新家庭』(1934) 2권 12호, 『女性』(1937) 2권 1호, 『中央』(1936) 4권 8호, 『中央』(1936) 4권 6호, 『女性』(1940) 5권 7호, 『新東亞』(1936) 6권 6호, 『中央』(1936) 4권 6호, 『朝光』(1936) 4호, 『朝光』(1938) 34호, 『女性』(1938) 3권 3호, 『博文』(1939) 8호, 『少年』(1938) 2권 6호, 『少年』(1938) 2권 8호, 『少年』(1938) 2권 3호, 『少年』(1938) 2권 1호·2호, 『中央』(1936) 4권 9호, 『朝光』(1935) 2호, 『朝光』(1939) 46호, 『女性』(1937) 2권 5호, 『少年』(1937) 1권 4호, 『少年』(1938) 2권 10호·11호, 『신조선』(1935) 11호, 『新世紀』(1939) 1권 7호, 『中央』(1936) 4권 1호, 『文章』(1939) 1권 10호, 『新家庭』(1935) 3권 8호, 『朝光』(1939) 50호에 발표되었다.

중요작품으로는 "봉선화"를 비롯해 "봄처녀"·"성불사의 밤" 등 이은상의 시에 붙인 가곡 및 제금곡으로는 "로맨스"·"조선의 애수," 관현악곡으로는 "동양풍 무곡" 및 기타 동요 100여 곡이 있다. 작품으로 "애수"(후에 가곡 "봉선화"로 개작, 1928)·"애수의 조선"(1931)·"동양풍 무곡"(1933) 등이 있다.

작품집으로 『조선동요백곡집』 상편(1929)과 하편(1933) 및 『조선가요곡집』(1933)이 있다. 소설로는 『처녀혼』·『큰 불』·『폭풍우 지난 뒤』·『비겁한 자』가 있고, 번역소설로 『여자의 일생』·『레 미제라불』·『최후의 악수』가 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963~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