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내

이애내

[ 李愛內 ]

요약 피아노 연주가. 이화여대(梨花女大) 음대 교수. 경성(京城) 출생. 일본 신호여학원(神戶女學院) 및 독일 백림(伯林)국립음악학교 졸업(1940). 이화여전(梨花女專) 음악과 전임강사.
출생 1907년
이애내

1933년 7월 23일 평남선수해구제(南鮮水害救濟) 3인 음악회 때 출연했다. 1934년 4월 10일 공회당에서 도구(渡歐)음악회를 열었다. 1936년 4월호 『음악평론』에서 이흥렬·김영환·김메리 등과 함께 양금가(洋琴家: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소개됐다. 1939년 6월 5일 부민관에서 귀국독주회를 열었다.

『中央』(1934) 8호에서 1934년 4월 10일 도구삼악인송별음악회(渡歐三樂人送別音樂會)를 개최했다고 소개됐고, 1934년 당시 독일 유학 중이라고 『中央』(1934) 8호의 朝鮮音樂家一覽 및 『三千里』(1934) 6권 9호에 각각 소개되었다. 독일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것이라는 소식은 『朝光』(1936) 7호에 나오고, 외국 유학에서 금의환향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女性』(1938) 3권 7호에 소개되었다. 그녀의 글 "백림서 음악수업 5년간"은 『女性』(1938) 3권 12호에 나오고, 『女性』(1939) 4권 1호의 "외국대학생 생활 좌담회"에 안호상·김선기·박경호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이화여전(梨花女專) 음악과의 전임강사로 일하게 됐다고 『女性』(1939) 4권 2호에 소개됐고, 조선일보사 주최 제4회 음악콩쿠르 피아노부 심사위원이라고 『朝光』(1939) 43호에 소개되었다. 그녀의 양금독주회(洋琴獨奏會)는 『博文』(1940) 14호의 음악실에 나오고, 그녀의 방송활동은 『女性』(1940) 5권 1호에 소개됐으며, 그녀의 피아노독주에 대한 기사는 『人文評論』(1940) 7호에 나온다. 그녀의 피아노독주회에 관한 소식은 『女性』(1940) 5권 6호에 나오고, 그녀의 부군 안병소와의 결혼생활은 『춘추』(1941) 5호에 소개되었다.

1941년 3월 25일 설립된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의 이사 14명 중 한국인 이사 함화진·김관·계정식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62년 당시 이화여대 음대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6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