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정식

계정식

[ 桂貞植 ]

요약 바이올린 연주가·지휘자. 평양 출생. 이화여전(梨花女專) 교수. 일본 동경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 및 독일뮌헨예술대학 졸업. 철학박사 취득. 고려심포니 및 서울심포니 창립·지휘.
출생 - 사망 1904년 ~ 1977년
계정식

1920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동양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1929년 독일의 뷔르츠음악대학을 졸업했으며, 1935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2년 도구(渡歐)기념음악회를 열었고, 1923년 9월 15일 평양공회당에서 도구음악회를 열었으며, 10월 19일 도구고별연주회가 김영환(金永煥)과 윤심덕(尹心悳)의 찬조 출연으로 경성에서 열었다. 1926년 9월 31일 중앙기독교청년회 주최 대음악회 때 출연했다. 1934년 10월 하순 공회당에서 귀국독주회를 열었다.

1936년 계정식현악중주단(桂貞植絃樂重奏團)을 발족했다. 『음악평론』(1936) 4월호에서 홍난파·홍성유·이영세 등과 함께 제금가(提琴家: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소개됐다. 1939년 6월 8~9일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全朝鮮作曲發表大音樂祭) 때 김세형(金世炯) 작곡의 "환상곡 작품31번"을 연주했으며, 1942년 5월 15일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의 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그가 취입한 바이올린 독주곡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계정식독주회의 소식이 『藝術』(1935) 1권 3호에 소개됐으며, 콜럼비아음반의 청반(靑盤)에 취입한 그의 독주반(獨奏盤)은 『朝光』(1936) 3호에 소개되었다. 그가 박태철·김인수·안성교와 함께 현악4중주단을 조직했다는 소식은 『朝光』(1936) 6호에 나온다. 그가 현악4중주단 조직에 노력한다는 소식은 『朝光』(1936) 9호의 악단소식에 나온다.

그의 제금독주회(提琴獨奏會)에 대한 평은 『朝光』(1943) 87호에 발표한 김세형의 "계정식 제금독주회 소감"에 전하고, "음악월평: 후생실내악단을 듣고"는 『朝光』(1943) 88호에, 그리고 홍난파(洪蘭坡)가 지은 『음악만필』(音樂漫筆)에 대한 그의 서평은 『朝光』(1938) 35호에 각각 발표되었다. 1940년 7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신동아음악 건설" 및 1941년 6월 5일자 매일신보에 "음악보국의 의의"라는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1년 3월 25일 설립된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의 이사 14명 중 조선인 이사 함화진(咸和鎭)·김관(金管)·김원복(金元福)·김재훈(金載勳) 및 평의원 홍난파(洪蘭坡)·김세형(金世炯)·이애내(李愛內)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1년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주최 「음악보국주간음악대제전」에 김재생·홍지유·이흥렬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5년 9월 15일 고려교향협회가 고려교향악단(高麗交響樂團)을 창단하고 10월 창단공연을 수도극장에서 열었을 때,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등을 연주했다. 1946년 서울관현악단이 조직됐을 때 지휘자였으며, 1946년 3월 고려교향악단의 창단공연 이후 제6회 정기공연 때까지 지휘를 맡았다. 1947년 3월 제2회 정기공연, 제4회·제5회·제6회 정기공연 때에도 지휘했다.

1956년 7월 24일 한국음악단체연합회(韓國音樂團體聯合會) 창립 대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57년 설립한 아카데미3중주단의 멤버였다. 1957년 5월 김종명(첼로)·김동성(피아노)과 함께 아카데미3중주단의 창단연주회를 개최했으며, 5월 17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제3회 연주회 때 출연했고, 5월 18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첫 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49~50쪽
  • 『韓國近代音樂人事典』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09년, 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