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선

채동선

[ 蔡東鮮 ]

요약 바이올린 연주가. 전라남도 보성군(寶城郡) 벌교(筏橋) 출생. 이화여전(梨花女專) 교수 채선엽(蔡善葉)의 오빠.
출생 - 사망 1901년 ~ 1953년
채동선

전라도의 부호 채중현의 아들로 태어나 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해 경기고보(京畿高普: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홍난파(洪蘭坡)의 바이올린 독주회에 참석해 감동을 받아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1918년 무렵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3·1운동에 참가한 문제로 경기고보 4년 수료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와세다(早稻田)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영문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기 위해 도미(渡美)했다가 중도 포기하였다.

1924년 10월 20일 전선남녀전문학교 연합음악회 때 출연했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해 리하르트 하르처에게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1926년 베를린의 슈테른센음악원에 입학해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929년 귀국해 연희전문(延禧專門)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1929년 귀국독주회를 비롯해 1939년까지 모두 네 차례의 바이올린독주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2월 11일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가 창립됐을 때, 이사장 현제명, 이사 홍난파·김영환·안기영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0년 최호영(제2 바이올린)·이혜구(비올라)·일본인 첼리스트와 함께 우리나라 채동선실내악단(蔡東鮮室內樂團)을 만들었다.

1932년 장곡천정공회당에서 가곡발표회를 채선엽의 독창으로 열었고, 10월 이전(梨專)강당에서 가곡발표회를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악4중주단을 결성해 활동했으며, 그가 작곡한 현악4중주 제1번을 포함한 창작곡발표회를 1932년 하세가와(長谷川)공회당에서 가짐으로써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창작발표회를 가진 작곡가가 되었다. 작곡가로서의 음악활동은 1932년 작곡한 현악 4중주 제1번을 시작으로 전개됐다. 1933년 작곡한 대표 가곡 "고향"은 정지용(鄭芝鎔)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이다.

19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1932년 "고향"·"내 마음은"·"바다" 등을 작곡했다. 1936년 4월호 『음악평론』에서 홍난파·계정식·홍성유 등과 함께 소개됐다. 1933년에 작곡한 그의 대표가곡 "고향"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고, 1937년에는 그의 첫 작곡집이 발간됐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우리의 민요채집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다.

1939년 6월 8~9일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全朝鮮作曲發表大音樂祭)에서 "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를 발표하였다.

채동선 관련의 여러 기사는 『東光』(1931) 22호, 『三千里』(1932) 4권 7호, 『新家庭』(1934) 2권 8호, 『藝術』(1935) 1권 3호, 『朝光』(1936) 3호, 『新世紀』(1939) 1권 3호 등에 나온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요채집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다. 이 작업은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1945년 8·15해방 후에 다시 작곡에 전념하여, 교성곡 "조국"·"독립축전곡," 칸타타 "한강" 등과 "선열추모가"·"한글날"·"3·1절"·"개천절"·"무궁화의 노래" 등을 창작했다. 민요 편곡 및 전통음악 발굴에도 심혈을 기울여 "서울아리랑"을 비롯하여 "진도아리랑"·"도라지타령"·"흥타령" 등 많은 민요를 합창곡으로 편곡했으며, "별유천지"(別有天地) 등을 채보하였다. 1945년 고려음악협회(高麗音樂協會)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8월 그의 관현악곡 "조선"을 고려교향악단(高麗交響樂團)이 초연하였다.

1947년 8월 함화진의 뒤를 이어 박헌봉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의 원장으로 취임했을 때 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음악문화』(1948) 4월에 "민족음악의 수립론"을 발표하였다. 1948년 고려합창단(高麗合唱團)을 조직했으며, 그 외에 고려작곡협회(高麗作曲協會) 회장(1947), 서울특별시 문화위원(1947), 문교부 예술위원(1949), 한국음악가협회(韓國音樂家協會)의 중앙위원(1949), 국립중앙극장 운영위원(1950), 국악원 이사(1950), 예술원 위원(1952)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서울대 상대와 숙명여대(淑明女大)에서 독일어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부산 피난시절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1979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됐고, 사후인 1964년과 1980년에 가곡집이 발간됐다. 1983년 박용구(朴容九)를 회장으로 채동선기념사업회(蔡東鮮紀念事業會)를 조직하여 매년 젊은 음악가에게 「채동선음악상」을 수여하였다.

작품으로 "현악 4중주 제1번 G단조"(1932)·"바이올린 환상곡 라단조"(1939)·교성곡 "한강"(1947) 등이 있고, 가곡 "고향"(故鄕) 외에 교향곡 "조선만세"(朝鮮萬歲)와 미발표작 현악 4중주곡·합창곡 등이 있다.

1964년 3월 서울시향 제112회 정기연주회 때 유작(遺作) "교향곡 한강(漢江)"이 발표됐다. 1983년 KBS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 때 "현악합주를 위한 협주곡 제9번"이 연주됐으며, 3월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에 의한 가곡 "또 하나 다른 태양" 등 8곡이 예음홀에서 발표되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8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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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

채동선 1901∼1953. 작곡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