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구

박용구

[ 朴容九 ]

요약 음악평론가. 경상북도 풍기(豊基) 출생.
출생 1914년
박용구

평양고보(平壤高普)를 거쳐 일본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에서 수학했다. 1937년 음악학교를 졸업하자 음악평론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7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춘향전·"벌판"·"지평선" 등을 무대에 올렸고, 기관지 『막』(幕)을 발행해 음악비평의 선두주자로 활동했다.

1940년 귀국하여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잠시 지내던 국내활동을 접고 서울을 떠나 하얼빈 등지를 돌며 새로운 경험을 쌓았다.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그곳에서도 극단을 조직해 무대에 올렸다. 1941년 언론인 설의식(薛義植), 연극인 서항석(徐恒錫), 극작가 박노홍(朴魯洪)이 중심이 되어 민족적인 가극운동을 부르짖고 일어섰을 당시에 출범한 라미라가극단(羅美羅歌劇團)이 안기영(安基永) 작곡의 가극 "콩쥐팥쥐"를 첫무대에 올렸다. 이어 가극 "견우직녀"(牽牛織女)를 부민관에 올려 성공을 거두었을 때, 바리톤 박용구는 소프라노 성애라(成愛羅)를 비롯해 윤부길(尹富吉)·이성운(李成雲)·송진혁(宋鎭赫)·권진원(權鎭源)·민경식(閔景植)·임천수(林千壽)·김형래(金炯來)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2년 평양에서 성공적인 극단 공연을 가졌으며, 1944년 해방되기까지 경성 동흥실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글 "서론적(緖論的)인 음악극론(音樂劇論)"은 『幕』(1939) 3호에 발표했고, 그의 글 "음악계의 파행성(跛行性): 악계의 1년"은 『춘추』(1943) 34호에 발표되었다. 1946년 『신세대』(1946) 2월에 발표한 "음악유산의 섭취문제: 베토벤의 방법과 무소르그스키적 방법"은 민족음악의 수립과 관련된 대표적인 글의 하나이다.

1960년 12월 베르디의 "오델로" 공연 때 연출했고, 1962년 1월 '옛과 어제를 그리며 내일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으로 예그린악단이 창단됐을 때 음악고문위원이었다. 1976년에 발족한 음악팬클럽의 회장이었고, 1976년도 일간지 또는 월간지에 평론을 발표하였다. 1977년 김형주·이상만·이성삼 등과 함께 일간지를 통해 평론활동을 폈고, 주로 『공간』과 『현대예술』에 평론을 발표했다. 국립국악원 정례발표회 때 "한국전통음악의 세계성"을 발표하였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기념예술제 때 공연된 황병기(黃秉冀) 작곡의 무용극 "바리" 대본을 창작했다. 1979년 『공간』에 음악평론을 발표했으며, 1980년도 『공간』·『극장예술』에 음악평을 실었다. 1983년 9월 20일자 서울신문에 음악평을 발표했고, 1984년 10월 13일자 한국일보에 음악평을 발표했으며, 『음악동아』·『객석』·『공간』·일간신문 등에 음악평을 발표하였다.

1986년『공간』·한국일보에 음악평을 발표했고, 1987년 『객석』 등에 총 14회의 음악평을 발표하였다. 1988년 『객석』에 총 8편의 음악평을 발표했고, 1989년 『객석』·『레코드음악』에 시평 또는 비평문을 발표하였다.

『음악과현실』 표지

『음악과현실』 표지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359~60, 5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