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영

안기영

[ 安基永 ]

요약 성악가(테너)·작곡가. 평양음악대학(平壤音樂大學) 교수. 충남 청양(靑陽) 출생. 이화여전(梨花女專)·경성고등음악학원(京城高等音樂學院) 교수 역임. 조선가요협회(朝鮮歌謠協會)의 발기인.
출생 - 사망 1900년 ~ 1980년
안기영

1915년부터 김인식(金仁湜)에게 풍금(風琴)과 창가(唱歌)를 배웠다. 1917년 연희전문(延禧專門)에 입학하여 김영환(金永煥)에게 성악을 본격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후 만주의 신흥학교를 거쳐 남경(南京) 금릉대학에서 고학하고 1923년 귀국해 이화여전 음악과 조교수로 들어갔다.

1923년 종로청년회관에서 열린 윤심덕(尹心悳)의 노래를 듣고 성악가의 꿈을 굳히고 1925년 미국 포틀랜드 엘리슨 화이트음대(Ellison-White Conservatory)에 입학해 성악공부를 시작했다. 1925년 10월 12일 중앙기독청년회 주최 추기음악회 때 출연했다. 1928년 9월 10일 YMCA강당에서 독창회를 열었고, 11월 8일 중앙유치원 주최 「음악의 밤」 때 출연하였다. 1928년 6월 귀국해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성악·화성학·작곡기법을 가르쳤으며, 그해 안기영독창회를 열었다.

우리나라 전통민요에 관심을 두고 1929년 동요 "그리운 강남"을 비롯해 "조선의 꽃"·"살구꽃"·"해당화" 등을 작곡해 『안기영작곡집』 제1집(1929)과 제2집(1931) 및 제3집(1936)을 내놓았다. 1931년 『조선민요합창곡집』을 발간했으며, 같은 해 콜럼비아사에서 민요합창곡을 취입했다.

『안기영작곡집』

『안기영작곡집』

1929년 2월 25일 조선가요의 민중화를 위해 이광수(李光洙)·주요한(朱耀翰)·김정식(金廷湜) 등과 함께 조선가요협회(朝鮮歌謠協會)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작곡부를 담당했다. 1929년 4월 15일 조선가요협회의 제1회 작품수집 보고가 있었으며, 열네 편의 작품은 동 협회 작곡부의 김영환·안기영·정순철에게 넘겨졌다.

1929년부터 일본빅타축음기주식회사가 발매하기 시작한 조선음반에는 그의 "그리운 강남" 등을 취입했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남성독창·남성4부·"내 집 귀한 집"·"망향가"(望鄕歌)·"불어라 봄바람"은 일축(日蓄)조선소리반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그가 작곡한 "그리운 강남"·"물새"·"살구꽃"·"오늘도 조약돌을"·"자진산타령"·"춘사"(春詞)·"한양의 봄," 그리고 그가 테너독창으로 취입한 가극·"거룩한 성"(城)·"그리운 강남"을 포함한 10여 곡의 노래는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1930년 조선음악가협회(朝鮮音樂家協會)에서 이사장 현제명, 이사 홍난파·김영환·채동선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31년 "조선민요와 그 악보화"라는 글을 『동광』 5월호에 발표했다. 1931년 『안기영작곡집』 제2집을 출간했다.

1935년 11월 8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닙본노홍 조선소리판의 광고에 그가 노래한 "고향을 떠나"와 "제비들은 강남에"가 소개됐다. 이화여전 시절 합창단을 지도해 교내 발표와 전국 순회연주활동을 전개했다. 1931년에는 전통민요를 편곡한 『조선민요합창곡집』을 출간했고, 같은 해 콜럼비아사에서 민요합창곡을 취입하였다.

김영복의 피아노반주 및 일본 빅타관현악단 반주로 취입한 "그리운 강남"·"그리움"을 포함한 노래와 "주께로 옵니다" 등의 찬송가는 일본 빅타음반에 전하고, 그가 취입한 "그때 날 생각하리라"·"농부가"·"방아타령"·"하소연"은 시에론음반에 전한다. 일제강점기 그가 취입한 "갈매기"·"내 사랑아" 등의 노래와 "하늘 가는 밝은 길" 등의 찬송가는 『조선레코드총목록』에 전한다.

안기영 작곡의 그리운 강남(『국민가요곡집』)

안기영 작곡의 그리운 강남(『국민가요곡집』)

이화여전에서 성악과에서 화성법·대위법·음악사를 가르치며 제자를 양성하는 한편 가요협회(歌謠協會)에 들어가 작곡도 했다. 처녀작으로 "그리운 강남"(1928)을 써서 유명해졌다. 가요 "작별"(作別)과 동요 "조선의 꽃"은 대표작이다. 한편 성우회(聲友會)라는 합창단을 조직해 공연활동을 벌였고, 노래를 직접 레코드에 취입했다. 1939년 6월 8~9일 「전조선작곡발표대음악제」(全朝鮮作曲發表大音樂祭)에서 성악곡 "작별"·"꿈조차 속였세라"·"오 나의 마음"·"마음의 등대"·"부끄러움"을 발표하였다.

1940년대 라미라가극단(羅美羅歌劇團)의 지휘를 겸임하면서 민요를 바탕으로 "콩쥐팥쥐"(1941)·"견우직녀"(牽牛織女 1942)·"은하수"(銀河水 1943)·"에밀레종"(1942)·"장화홍련"(薔花紅蓮 1942) 등의 향토가극의 새로운 음악극(音樂劇)을 창작했다. 일본축음기주식회사의 일축음반(日蓄音盤: K529, K530, K531, K548, K550)에 남성4부·"갈매기"·"아이 재우는 소리"·"내 사랑아"를 포함한 10여 곡의 노래 및 찬송가("주 믿는 자들")를 독창으로 취입한 양악(洋樂)의 선구자이다.

1945년 8월 16일에 결성된 조선음악건설본부(朝鮮音樂建設本部)의 성악부 위원장을, 그리고 1945년 12월에 결성된 조선음악가동맹(朝鮮音樂家同盟)의 부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8·15광복 직후 애창된 해방가요로 "해방전사의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는 음악건설본부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 시절 작곡한 것이다.

1947년 근로인민당의 음악부장을 하면서 당수 여운형이 암살됐을 때 추도곡을 작곡해 지휘했다는 이유로 음악활동을 중지 당했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음악인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하였다.

1950년 9월 월북해 국립예술극장 작곡가로, 1951년부터 평양음악대학 성악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양성과 창작활동을 했다. 이 시기 "마누라의 기쁨"·"더더리장"·"강기슭에서"·"비 내린 뒤"를 비롯한 수십 편의 가요와 "김장군의 호소 받들고"·"우리 아버지"·"아름다운 거리"·"해바라기" 외 20여 편의 동요 합창곡, "풍년타령," 3편의 기악곡을 작곡했고, 음악대학 교재와 여러 논문을 발표하였다. 1956년 예술가 급수 1급을 받았다.

1951년 평양음악대학 성악교수 시절 『성악연습곡』을 비롯해 "민족성악에 발성법을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가요 "돌격대의 노래" 등 10여 편 및 "해바라기"를 포함한 20여 편의 동요를 창작했으며, 1980년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은 월북작곡가(越北作曲家)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남한에서 한때 금지됐지만, 1988년 10월 6일 월북작곡가의 해금가곡제(解禁歌曲祭) 때 "마의태자"(麻衣太子)·"작별"(作別)·"그리운 강남" 등이 공연되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498~5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