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

풍금

[ 風琴 ]

요약 서양 오르간(organ)의 한역어(漢譯語).

영조(1724~1776) 때 문사(文士) (洪大容)과 풍금 관련 기사는 (朴趾源)의 「천주당」(天主堂)에 이렇게 전한다.

"내 친구 홍덕보(洪德保: 홍대용)가 예전에 서양 사람들의 기교를 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선배들 가운데 김가재(金稼齋: 김창업)와 이일암(李一菴: 이기지) 같은 이들은 모두 견식이 탁월하여 후세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분들이다. 더구나 중국을 옳게 본 테에 대해서는 쳐줄 점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북경의 천주당에 대한 그들의 기록에 대해서는 약간의 유감이 없지 않다. ··· 가재(稼齋)는 건물이나 그림만 상세히 보았고, 일암(一菴)은 더욱 그림과 천문 관측의 기계를 자세히 설명했지만, 풍금 이야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두 분이 음률에 대해서는 그리 밝지 못했으므로,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도 귀로 소리를 밝게 들었고, 눈으로 그 만든 솜씨를 살폈지만, 그 오묘한 부분들을 글로 다시 옮길 수 없으니 정말 유감스럽다'라고. ··· 이 풍금은 서양 사신 서일승(徐日昇)이 만들 것이라고 한다.

덕보(德保)가 다 읽고 나더니 한바탕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말로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세하진 못하다는 격일세. 속에 기둥이나 서까래같이 생겼다는 통은 유기로 만들었고, 제일 커다란 통은 기둥이나 서까래만한데, 크고 작은 통들은 총총하게 섰네. 이는 생황 소리를 내기 위해서 크게 한 것일세.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은 다음 틀을 취하여 곱절로 더 보태고, 8율(律)씩 띄어 곧장 상생(相生)케 하니, 8괘(卦)가 변해 64괘가 되는 것과 같다네. ··· 이렇게 내가 대강 말하긴 했지만, 역시 그 오묘한 점을 다 말할 수는 없네. 만약 나라에서 돈을 내어 풍금을 만들라고 명령한다면, 만들어볼 수도 있지.' ··· 서양이 중국과 서로 통한 것은 대체로 이마두(利瑪竇)부터 시작되었다. 건륭(乾隆) 기축년(1769)에 천주당이 헐렸으므로, 풍금은 남은 것이 없었다. 다락 위의 망원경과 또 여러 가지 표본기들은 창졸간에 연구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 이제 덕보가 풍금 제도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서글픈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라고.

참고문헌

  • 『樂人列傳』 허경진, 서울: 한길사, 2005년, 576~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