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정악전습소

조선정악전습소

[ 朝鮮正樂傳習所 ]

요약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음악교육기관.

(調陽俱樂部)의 후신으로 1911년 재발족한 조선정악전습소는 후원단체인 (正樂維持會)의 재정적 도움으로 운영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전문음악교육기관이다.

창립 당시의 임원진으로는 (韓錫振)이 소장이었고, (洪肯燮)은 소감이었다. 교사진은 (金景南: )·(金相淳: )·(明完璧: )·(李永煥: 가곡)·(李春雨: )·(趙東錫: 단소)·(趙彛淳: 거문고)·(河順一: 가곡)·(韓圭祐: 가야금)·함화진(咸和鎭: 가야금)이었다. 이 임원진으로 조양구락부가 출범했으나, 실제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1911년 2월 정악유지회가 조직됐다. 같은 해 6월 16일 박영효(朴泳孝) 회장이 이왕가(李王家)의 낙도장려 명목의 하사금을 받아 조선정악전습소라는 간판으로 재출범하였다. 1911년 11월 10일 (河圭一)을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學監)으로 영입함으로써 조선정악전습소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비로소 가동하였다.

조선정악전습소는가요부(歌謠部)·음악부(音樂部)·악기제조부(樂器製造部)로 구성됐다. 음악부에는 조선악과(朝鮮樂科) 및 서양악과(西洋樂科)를 두었다. 가요부와 음악부는 기성 음악인을 위한 이습과(肄習科)와 초보자를 위한 교수과(敎授科)로 구분됐다. 조선악과의 학과목은 가곡·거문고·가야금·양금·단소··(吹樂)이고, 서양악과의 학과목은 (風琴: 오르간)·(四絃琴: 바이올린)·서양악리(西洋樂理)였다.

설립 당시 서양악과의 교사는 김인식(金仁湜)이었고, 후에 서양악과의 졸업생 하대홍(河大泓)과 염광섭(廉光燮)이 보조교사로 임명됐다. 교육기간은 1년이었고, 학생의 정원은 50명이었다.

1912년 조선성악전습소의 제1회 졸업생은 조선악과 5명과 서양악과 13명, 모두 18명이었다. 1913년 제2회 졸업생은 조선악과의 (李尙俊)을 비롯한 13명, 그리고 서양악과에는 성악 전공의 (洪永厚)를 비롯한 7명, 모두 20명이었다. 3회 졸업생을 정점으로 해서 그 후부터 입학생이 차츰 줄었고, 1916년부터는 친일단체 교풍회(矯風會)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한석진·홍금섭·하규일· 등이 조선정악전습소를 떠난 탓에 교육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11년 당시의 위치는 옛날 (耆老所)를 수리하여 쓰다가 1912년 5월 체신국(遞信局)에게 그 장소를 빼앗기고, 재동(齋洞)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서 사무를 보았다. 1912년 7월 여악을 가르치기 위해서 중부(中部) 상다동(上茶洞)에 분실을 두었다. 1913년 당시 조선정악전습소의 임원 및 교사는 다음 표와 같다.

1913년 당시 조선정악전습소의 임원 및 교사 일람표

1913년 당시 조선정악전습소의 임원 및 교사 일람표
이름 직책 전공 분야 본관 임용 일자

한석진(韓錫振)

소장(所長)

-

청주(淸州)

1909.12.

홍긍섭(洪肯燮)

소감(所監)

-

남양(南陽)

1909.12.

하규일(河圭一)

학감(學監)

-

진주(晉州)

1911.10.

백용진(白溶鎭)

사무원

양금

수원(水原)

1911.6.

한진구(韓鎭九)

사무원

생황

청주(淸州)

1911.6.

유종렬(劉鍾烈)

회계(會計)

-

강릉(江陵)

1911

김효연(金孝淵)

서기(書記)

-

김해(金海)

1912

하순일(河順一)

분실감독

가곡

진주(晉州)

1909.12.

이영환(李永煥)

교사(敎師)

가곡

전주(全州)

1912.12.

김경남(金景南)

교사

현금

경주(慶州)

1912.12.

조이순(趙彛淳)

교사

현금

백천(白川)

1912.12.

명완벽(明完璧)

교사

가야금

서촉(西蜀)

1912.12.

함화진(咸和鎭)

교사

가야금

양근(楊根)

1912.12.

한규우(韓圭祐)

교사

가야금

청주(淸州)

1912.12.

김상순(金相淳)

교사

양금

김해(金海)

1912.12.

이춘우(李春雨)

교사

단소

전주(全州)

1912.12.

조동석(趙東錫)

교사

단소

한양(漢陽)

1912.12.

김인식(金仁湜)

교사

서양악

성주(星州)

1911.9.

염광섭(廉光燮)

보조교사

서양악

파주(坡州)

1913.2.

하대홍(河大泓)

보조교사

서양악

진주(晉州)

1913.2.

조선악과의 제1회 졸업생은 현금(玄琴)과의 한진구, 양금과(洋琴科)의 김상순, 가야금과의 한규우, 단소과(短簫科)의 현동철이고, 제2회 졸업생은 가곡(歌曲)의 이상준, 현금과의 민병섭·김용적, 가야금과(伽倻琴科)의 육정수·박서양 및 양금과의 유명근·임병찬··이승청·김용면·조종룡··장인석이었으며, 제3회 졸업생은 현금과의 홍석후·서상앵·최영재·김명준·유병필·김규진 및 양금과의 신성현·오창헌·장세환·김승렬·조명호·정창윤·이항식·홍덕유·이범각·서정학이었다. 서양악과(西洋樂科)의 졸업생은 아래의 표와 같은데, 제2회 졸업생 중 성악과 및 제3회 졸업생 중 기악과의 홍영후는 의 본명이다.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의 졸업생 일람표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의 졸업생 일람표
제1회 졸업생
전공별 이름 본적

성악과(聲樂科)

하대홍(河大泓)

경성(京城)

안종건(安鍾健)

경성

최용환(崔庸煥)

함남(咸南)

인창섭(印昌燮)

전북(全北)

한윤원(韓崙源)

경성

이창호(李昌鎬)

경성

한진구(韓鎭九)

경성

민영진(閔泳璡)

경성

악리과(樂理科)

함화진(咸和鎭)

경성

김의균(金宜均)

경성

한규우(韓圭祐)

경성

백윤기(白潤琦)

경성

백종성(白宗聖)

평북(平北)

제2회 졸업생

풍금과(風琴科)

염광섭(廉光燮)

경성(京城)

사현금과(四絃琴科)

하대홍(河大泓)

경성

성악과(聲樂科)

안태협(安泰協)

경성

홍영후(洪永厚)

경성

이규남(李圭南)

경성

백윤기(白潤琦)

경성

오건영(吳建泳)

경성

제3회 졸업생

성악과(聲樂科)

김승수(金承洙)

평북(平北)

백낙근(白樂瑾)

경성(京城)

전희철(田熙哲)

황해(黃海)

최양대(崔養大)

경성(京城)

이하영(李夏永)

경성

강세형(姜世馨)

경성

양용주(梁龍珠)

경남(慶南)

서상문(徐相文)

경성(京城)

구자영(具滋英)

경성

피병춘(皮秉春)

경성

기악과(器樂科)

홍영후

경성

백윤기(白潤琦)

경성

한윤원(韓崙源)

경기(京妓)

이경혁(李卿赫)

경성(京城)

박칠양(朴七陽)

경성

최양대(崔養大)

경성

김병호(金丙浩)

경성

황덕준(黃德俊)

경성

최재덕(崔在德)

경성

김승수(金承洙)

평북(平北)

백낙근(白樂瑾)

경성(京城)

전희철(田熙哲)

황해(黃海)

손형신(孫亨信)

충남(忠南)

정영준(鄭永俊)

경성(京城)

강세형(姜世馨)

경성

이재영(李在榮)

경성

장진섭(張震燮)

경성

조필현(趙弼顯)

경성

구자영(具滋英)

경성

구자옥(具滋玉)

경성

장관현(張觀炫)

경성

박민섭(朴敏燮)

경성

서상문(徐相文)

경성

1914년까지 제3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조선정악전습소는 정악유지회의 경제적 후원이 없어지자 교육활동을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1935년에 조직된 (水曜會)에 의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해방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명맥은 (韓國正樂院)으로 전승됐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5.1954~60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34~35, 666~67쪽
  • 『文藝總鑑』, 서울: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6년, 257쪽

참조어

정악원(正樂院), 조선정악원(朝鮮正樂院),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조선악과(朝鮮樂科), 한국정악원(韓國正樂院) , 서양악과(西洋樂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