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영

나운영

[ 羅運榮 ]

요약 작곡가. 연세대(延世大) 교수. 서울 출생. 일본 동경 제국고등음악학교(帝國高等音樂學校) 졸업.
출생 - 사망 1922년 ~ 1993년
나운영

5세 때 양금을 배우기 시작했고, 양악과 가까워진 것은 미동초등학교 3학년 때 하모니카를 통해서였다. 중앙고보(中央高普)에 진학해 음악선생 김형준(金亨俊)과 박태현(朴泰鉉)을 통해 음악에 대한 흥미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중앙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 동경 제국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그는 김성태(金聖泰)와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郞)에게 사사했다.

14세 때 김수경 작시의 "아 가을인가"를 작곡했으며, 17세 때인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신춘현상공모에서 가곡 "가려나"로 입상하였다. 태평양전쟁 통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1943년 귀국해 채동선현악4중주단,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에서 첼로 연주자로 활동했다. 1945년부터 중앙여자전문학교(현 중앙대 전신)에 재직하면서 광복을 맞았다.

1941년 "현악합주를 위한 합주협주곡"을, 1942년 "현악 4중주 제1번 낭만"과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 제1번"을 발표했다. 1945년 전조선신춘음악회 때 출연하였다. 1944년에 재편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의 단원인 그는 이사장 현제명(玄濟明) 아래 김원복·윤기선·이흥렬 등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8·15광복의 기쁨을 담은 그의 대표적 해방가요(解放歌謠)로 애창된 "건국의 노래"가 있고, 8·15광복 이후 발표한 가곡으로 "박쥐"·"달밤"·"가는 길"·"별과 새에게"·"강 건너간 노래" 등이 있다. 1946년 기악곡으로 고전풍의 첼로소나타를 작곡했다. 1946년 경성음악전문학교(京城音樂專門學校)가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에 따라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로 개편됐을 때 교수진의 한 사람이었다. 1946년 군정청(軍政廳) 시절 『초등노래책』을 출간하였다. 1946년 민족음악연구소(民族音樂研究所)를 창립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음악술어의 제정 때 참여했고, 1952년 나운영의 가곡집 『아흔아홉냥』을 출간했다.

1952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한 이후 기독교 찬송가를 1,105곡 작곡하였다. 1952년 한국현대음악회(韓國現代音樂會)를 창립하여 현대음악의 계몽사업에 앞장섰다. 1957년 한국현대음악회를 한국현대음악협회(韓國現代音樂協會)로 재발족했으며, 동시에 국제현대음악협회(國際現代音樂協會, ISCM)에 가입하였다. 1955년 "바이올린을 위한 산조(散調)"가 초연되어 기악곡에서 구체적인 한국적 표현이 이루어졌고, 이것은 연세대학교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적 창작의 큰 막을 이루어갔다.

1954년 1월 11일 가곡집 『다윗의 노래』를 발간하였다. '선토착화(先土着化) 후현대화(後現代化)'라는 신념으로 한국적인 작품 개척을 위하여 전력했고, 12음기법 등의 도입과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표현을 위하여 이론정립과 창작을 병행하였다. 작품의 범주는 교향악·실내악·오페라·성악곡 등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범주는 역시 교회음악이었다. 교육자로 서울대·이화여대·덕성여대·세종대·목원대·전남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지만 1955년부터 1976년까지 연세대에서 가장 오래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5년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한국작곡가협회(韓國作曲家協會) 주최 제1회 작곡발표회를 열었을 때 그의 12음기법에 의한 피아노곡이 발표되었다. 1957년 국제현대음악협회(ISCM) 한국지부장 등으로 활동했고, 1957년 12월 17일 연세대음악회 때 출연하였다.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기념 서울시향의 8·15경축음악회에서 "교향곡 1번"을 발표했으며, 12월 18일 새문안교회에서 제4회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959년 동자아악단(현 운경아악단)을 설립했으며, 1962년 공보부 주최 제1회 국제음악제 때 "교향곡 2번"이 초연됐다. 1962년 제1회 국제음악제에서 그의 "교향곡 제2번"이 초연됐으며, 제2회 국제음악제 때 작품을 발표하였다.

1965년 세계문화작곡회의의 현대음악발표회 때 "관악·현악·타악기를 위한 시나위"를 발표했다. 1966년 12월 6일 국립중앙극장에서 심포니곡 작품발표회를 열었으며, 1968년 3월 24일 국립중앙극장에서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969년 제1회 서울음악제 때 가곡 "청포도"·"산"·"밤거리에서"를 발표했고, 1970년 제2회 서울음악제 때 "교향곡 제9번"을 출품했다. 1973년 11월 13일 국립중앙극장에서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973년에는 한국민속음악박물관(韓國民俗音樂博物館)을 세웠고, 1974년 3월 13일과 11월 6일 예술극장에서 작곡발표회를 열었다. 1974년 미국 포틀랜드대학에서 명예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4월 23일 제3회 「한국음악의 밤」 때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전주곡"을 발표했고, 12월 1~2일 국립합창단의 한국합창곡 발표회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발표했다. 1977년 12월 6일 국립합창단 제8회 정기공연 때 "예루살렘 입성(入城)"을 발표했으며, 1980년 12월 9일 제12회 서울음악제의 「가곡과 합창의 밤」 때 "접동새"를 발표하였다.

1981년 11월 1~2일 제13회 서울음악제 때 위촉한 창작곡이 연주됐고, 1983년 4월 22일 한국예술가곡연구회의 제29회 「가곡의 밤」 때 출품하였다. 1989년 『음악저널』에 평론을 발표했고, 3월 26일 서울 호산나교회에서 신작 성가발표회를 열었으며, 5월 8~9일 20세기작곡연구회 창립20주년기념 연주회 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 등을 발표하였다. 1991년 3월 31일 호산나교회에서 제134회 신작성가발표회를 열었다. 1992년 5월 13일 92새마당 서울의 봄 때 출품했으며, 1993년 4월 9일 93새마당 Ⅱ(한국의 예술가곡) 때 "접동새"를 발표하였다.

13개의 교향곡을 비롯해 1천여 곡에 이르는 찬송가·합창곡·기악곡 등이 있다. 작품으로 "교향시 3·1혁명"(1950)·"교향곡제1번~제13번"(1958~1974)·"피아노 협주곡 제1번"(1964)·오페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1962) 등이 있다. "Violin Concerto No. 1"(1965)·"Symphony No. 7 성서"(1967)·"Violin Concerto No. 2" (1969)·"Symphony No. 13"(1974)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275~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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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영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