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생려

김생려

[ 金生麗 ]

요약 바이올린 연주가·지휘자.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평안북도 영변(寧邊) 출생.
출생 - 사망 1912년 ~ 1995년
김생려

어려서부터 오르간과 하모니카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매혹되어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와 지금의 경북고등학교인 제이고보(第二高普)에 입학했다. 김형준(金亨俊)의 소개로 알게 된 부스 여사에게 바이올린을 배워 함께 2중주도 했으며, 경성중앙관현악단(京城中央管絃樂團)의 바이올린 주자로 참여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귀국한 계정식(桂貞植)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고, 계정식이 주도하는 현악4중주단에서 제2 바이올린을 맡았다. 아버지의 강요로 세브란스의전으로 진학하려 했으나 실패한 그는 연희전문의 문과(文科)로 진학해 현제명(玄濟明)의 지도 아래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쌓으면서 학교 밴드부의 부장을 맡기도 했다. 연희전문 재학시절 경성중앙방송국(京城中央放送局) 관현악단(管絃樂團)의 자리를 얻었고, 빅타레코드사의 전속악단 바이올린 주자로 취직해 학비를 벌었다. 재학 당시 그와 함께 공부한 음악인으로 김성태·정희석·이인범·황재경 등이 있다.

음악콩쿠르수상자로 찍은 사진은 『朝光』(1938) 37호에 소개됐고, 음악콩쿠르에 출연한 그의 기량에 대한 평은 『朝光』(1938) 38호에 발표된 문학준의 평론 "제2회 전조선남녀음악콩쿨평"에 소개됐다. 그가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어머니의 힘"은 일본 콜럼비아음반에 전한다. 1929년에 부임한 현제명의 지도 아래 곽정선·곽정순·김관 등과 함께 활동했고, 1930년대 전반기 연희전문의 음악부에서 현제명의 지도 아래 김성태(바이올린)·이유선(성악)·황재경(플루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0년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따른 창씨개명(創氏改名) 때 가네야마(金山生麗)로 개명하였다. 1941년 조선교향악단(朝鮮交響樂團)의 창단연주회 때 및 1941년 조선음악협회(朝鮮音樂協會) 주최 음악회 때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1943년 징병제를 찬양하는 「반도개병(半島皆兵)의 노래발표회」 때 바이올린을 독주하였다. 1941년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음악협회 주최 「음악보국주간음악대제전」에 이흥렬·최창은·이관옥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1942년 창단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후원의 「전함헌납보국 실내교향악의 밤」 때 출연하였다. 1940년 무렵 김생려현악4중주단이 창립됐을 때 제1 바이올린 주자였고, 1942년 후생실내악단 조직됐을 때 대표였다. 이때부터 징병제를 찬양하는 「반도개병의 노래발표회」 및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전함헌납음악보국(戰艦獻納音樂報國) 실내교향악의 밤」 등에 출연하였다.

1945년 고려교향악단(高麗交響樂團)의 창단 때 악장이었고, 1946년 이재옥·정훈모·이인형·안성교·오병도·전봉초와 함께 광복 후 최초의 실내악단인 서울음악동호회를 결성했다. 이 동호회는 서울교향악단의 모체가 되었다. 1946년 서울관현악단이 조직됐을 때 악장이었고, 1947년 이용철·최규영·김준덕과 함께 김생려4중주단을 창단했다. 조봉덕·이규수·김순덕 등과 함께 서울관현악단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1948년 1월 서울교향악단을 출범시켰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모체가 되는 해군정훈음악대(海軍政訓音樂隊)를 결성했으며, 5월 서울교향악단 창립됐을 때 상임지휘자였다. 1948년 1월 출범한 서울교향악단에서 제1 바이올린 주자였다. 서울교향악단의 제15회 정기연주회 때 김성태의 "카프리치오"·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라벨의 "무곡(舞曲) 볼레로"를 지휘했으며, 제17회·제19회 정기연주회 때 지휘하였다.

1949년 11월 8일 한국음악가협회(韓國音樂家協會)가 결성됐을 때 중앙위원이었고, 1950년 10월 해군정훈음악대가 조직됐을 때 대장이었다. 1954년 제4회 서울시문화상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19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이 탄생됐을 때 상임 지휘자였고, 9월 10일 해군정훈음악대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서울특별시 소속의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새로 출발했을 때 지휘자였다.

1958년 10월 푸치니의 "토스카" 공연 때 지휘했고, 1959년 6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및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공연 때, 그리고 11월 국립중앙극장에서 비제의 "카르멘" 공연 때 지휘하였다. 1962년 '옛과 어제를 그리며 내일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으로 예그린악단이 1962년 1월 창단됐을 때 단장이었다. 1962년 경희대 음악과장·예그린악단 대표·예술회원·해군정훈음악대장·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한겨레음악인대사전』 宋芳松, 서울: 보고사, 2012년, 137~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