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소
[ 太平簫 ]
- 요약
향악기(鄕樂器)의 하나. 일명 날라리·새납·초나(哨吶)·쇄나(瑣)·쇄납(瑣)·호적. 본명은 대평소.
태평소(太平簫)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에서 모두 연주되는 태평소는 서양 오보에(oboe)종류의 관악기다. 목부(木部) 또는 공명악기(空鳴樂器, aerophone)에 든다.
〈역사적 유래〉 본래 서아시아 이슬람교국에서 중국에 소개된 태평소가 후에 우리나라에도 전래됐다. 오늘날 페르시아에서 이 관악기는 스르나(surna), 터키와 이라크에서는 즈르나(zurna), 북인도에서는 샤나이(shanai)라고 각각 불린다.
이 관악기의 중국식 역음(譯音)을 본떠서 우리나라에서 태평소를 초나(哨吶)·쇄나(瑣)·쇄납(瑣)라고 불렀다. 태평소를 호적이라고 부른 이유는 고려 말 몽골군을 통해서 전래됐기 때문이다. 이 관악기가 언제 우리나라에 소개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고려후기로 추정된다. 태평소라는 악기명은 정몽주(鄭夢周)의 시(詩)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조선초기 『태조실록』 권6에서 이 관악기를 태평소라고 했다.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7에서도 태평소라고 소개됐으며, 당악기(唐樂器)의 하나로 분류됐다.
『악학궤범』 권7에 처음으로 이 관악기의 그림이 나온다. 성종(1469~1494) 당시 태평소는 종묘의 헌가에서 향비파·거문고·당비파·방향·가야금·대금 등과 함께 편성됐고, 오례의 전정헌가(殿庭軒架)에서도 연주됐다.
태평소를 연주하는 정재국(국립국악원 제공)
조선초기 태평소는 오매(烏梅)·산유자(山柚子)·대추나무·황상(黃桑)·황양(黃楊) 등 단단한 나무를 쓰고, 그 속을 뚫고 겉은 대의 마디 같이 만든다. 상단과 하단은 구리로 만들고 설(舌: 혀)은 만로(蔓蘆: 갈대)로 만든다. 모두 8공으로 제2공은 뒤에 있다. 율법(律法)은 향피리(鄕觱篥)와 같다.
조선시대 군중에서 주로 사용된 태평소는 개폐문(開閉門)할 때 그리고 행진(行進)할 때 연주되는 "취타"(吹打)에서 쓰였다. 오늘날 "대취타"(大吹打)의 주요 선율악기로 쓰이고 있다. 또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의 연주 때 "정대업"의 "소무"(昭武)·"분웅"(奮雄)·"영관"(永觀)에서 연주됐다.
태평소의 손 짚는 법(『국악대사전』)
1829년(순조 2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호적 즉 태평소는 징(鉦)·고(鼓)·자바라(啫哱囉)·나발(喇叭)과 함께 내취(內吹)로 편성되어 선유락정재(船遊樂呈才)의 반주 때 연주됐다. 즉 1829년 자경전(慈慶殿)에서의 진찬(進饌) 때, 1848년(헌종 14) 통명전(通明殿)의 진찬(進饌) 때, 1868년(고종 5)과 1873년(고종 10) 강녕전(康寧殿)의 진찬(進饌) 때, 1877년(고종 14) 통명전의 진찬 때, 그리고 1887년(고종 24) 만경전(萬慶殿)의 진찬 때 태평소는 선유락정재의 반주 때 연주됐다.
조선후기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태평소는 호적(胡笛) 또는 쇄나(瑣)라고 불리고, 원나라에서 수입됐다고 시사했다. 오늘날 농악(農樂)에서 사용되는 태평소는 날라리라고 불린다.
〈제도 및 음역〉 원추형(圓錐形)의 몸통은 유자(柚子)나 황양(黃楊) 등의 단단한 나무로 제조되고, 나팔관처럼 생긴 동팔랑(銅八郞) 및 동구(銅口)는 모두 동(銅)으로 만들며, 동구에 삽입된 혀는 갈대로 제조된다. 여덟 개의 지공(指孔) 중 제2지공은 몸통의 뒤에 있다. 나머지 지공은 전면에 있다.
태평소의 음역은 피리(觱篥)와 같다고 『악학궤범』 권7에 전하지만, 현재 국립국악원의 태평소는 그렇지 않다. 농악에 쓰이는 날라리의 음역과 안공법(按孔法)은 일정하지 않다. 악기마다 조금씩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