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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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정치/경제/생업 > 시장이란 > 시장의 구성

서울의 시전

『경도잡지(京都雜志)』에 따르면 한성의 중심가에는 단전(緞廛), 주전(紬廛), 지전(紙廛), 포전(布廛) 등의 큰 점포들이 종가[鍾路]를 끼고 모여 있었고 기타 여러 상점들은 널리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장을 보는 사람들은 새벽에는 이현과 소의문 밖에 모였고 오후에는 종가로 모였다.
각 전의 주인들은 전시정(廛市井)이라고 불렸다. 이들에게는 가게에 대한 세습권이 인정되었다.
육의전을 중심으로 한 시전체제는 일제시대에 들어와 무너지고 그 대신 개인상가가 들어섰는데 백상회, 김윤면 상회, 손종수 포목점, 박승직 포목점 등이 유명하였다.
지금의 남대문시장은 남문안장, 또는 신창(新倉)안장이라고 불렸는데 그부근에는 미창(米倉)이 있었다. 동대문시장은 배오개장이라 불렸다. 일제는 1914년에 부령(府令), 즉 경성부 법령으로 시장규칙을 제정하고 각종 시장의 상권을 독차지하였는데 예외적으로 이 두 장만은 한국인들의 것으로 남겨두었다. 당시 새 규정에 의한 배오개시장의 등록자는 광장(廣藏)주식회사였으므로 배오개장을 광장시장이라고도 불렸다.

주막과 점막이 크게 증가하다

주막은 일명 주점 또는 술막 · 숫막이라고도 했으며, 탄막(炭幕) · 여점(旅店) · 야점(夜店) · 점막(店幕)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시대 각 지방의 시장 부근이나 주요 교통로의 요충지 등에 설치되었으며, 대개 술을 비롯하여 밥도 팔고 숙박업까지도 겸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부상이나 여유가 있는 장사꾼은 객주나 여각 같은 곳을 이용했지만, 대부분의 보부상이나 장돌뱅이, 여행객이 찾아드는 곳이 주막이나 점막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조선의 시장경제』에도 주막은 시장이 서는 곳 뿐만 아니라, 주요 도로의 요충지 · 시가지 · 도읍 · 선착장 · 산간벽지에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