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량/도구

도량/도구

분류 정치/경제/생업 > 시장이란 > 시장의 구성

거래문서

시장에서 통용되던 거래문서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어음(於音), 환간(換簡), 임치장(任置狀), 선지증(船之證), 출차표(出次表), 고본(股本), 세가문권(貰家文券), 장기(掌記), 수표(手標), 삭채표(朔彩票), 명문(明文), 보음지(保音紙), 전안(廛案) 등이 있다.

거래장부

거래문서의 일종인 거래장부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일기장(日記帳), 통장(通帳), 현금출납장(現金出納帳), 각방세책(各房稅冊), 물품거래장(物品去來帳), 위탁물처리장(委託物處理場), 어험수지장(魚驗收支帳), 회계책(會計冊), 손익계산장(損益計算帳), 분개장(分介帳) 등이 그것이다. 분개장에는 원장(元帳), 외상장책(外上帳冊), 타급장책(他給長策), 결산장(決算帳) 등이 포함된다. 사개부기(四介簿記) 또는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라고 하는, 개성상인들이 개발한 복식부기도 이러한 문서에 수록되어 있다.

도량형

우리 나라는 조선 세종 때 도량형을 정비하여 규격화를 꾀한 바 있었는데 이는 특히 향시의 유통구조를 원활히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일제 때는 화폐 단위가 원(圓)과 전(錢) 위주였으나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푼[分] 과 냥[兩]이 주된 단위였다.

엽전 한 개는 한푼이고, 10푼이 1전, 10전이 한 냥이었다. 고종 3년(1866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발행한 화폐가 당백전(當百錢)이다. 당백전이란 엽전 100개, 즉 한 냥의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었다.
당백전을 줄여 '당전'이라 하였는데 '땡전 한 닢 없다' 라는 말에서의 땡전은 이 당전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홉[合], 되[升], 말[斗], 섬[石]은 곡물, 간장, 술 등의 부피를 재는 단위이며 포대도 역시 부피의 단위로서 곡물, 채소, 술을 잴 때 사용된다.
물건을 재거나 세는 단위는 물건마다 각기 다르다. 시금치나 배추의 경우에는 다발 또는 단이고, 사과 · 마늘 등은 100개를 한 접, 김은 40장이나 100장을 한 톳, 조기는 10마리를 한 믓, 굴비는 20마리를 한 두름, 오이는 50개를 한 거리, 백지는 20장을 한 권이라 했다.

그 밖에 과실류는 상자 단위로 세고 무, 배추, 시금치, 파 등은 다발 또는 포기로 센다. 마늘, 감, 참외 등은 100개씩 묶어 접으로 계산한다. 달걀이나 건어물류는 꾸러미를 단위로 한다.

길이를 잴 때는 주로 주척(周尺)이 사용되었으나 경우에 따라 영조척(營造尺), 침척(針尺), 포척(布尺)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장세

점포는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들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납부하는 장옥세(場屋稅)보다는 장마다 걷는 노점세(露店稅)의 부담이 더 크다. 노점세는 장을 관리하는 면사무소에서 징수하는데, 벌여놓은 물건이 차지하는 면적을 부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일정한 것은 아니다.
장세는 지방관아의 판공비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장세는 국가재정의 하나로서 징수된 것이 아니라 지방관아에서 주요행사를 치르기 위해 임의적으로 거두는 것이었다. 장세 징수업무는 관아에서 임명한 하급관리인 감고들이 담당하였는데, 여기에는 많은 폐단이 있었다.

장세의 사용내역

손님을 맞이하거나 보낼 때

봄, 가을로 향교에 제사를 지낼때

소나 말의 사료값

향소(鄕所)에서 쓰는 음식비

병영에 필요한 물자 조달

수레의 발달

교통로의 확충과 상품유통량의 증대에 따라 18세기 이래 육로에서의 운송수단인 수레의 제조와 사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실학자 홍량호(洪良浩)는 수레 사용이 말을 이용하는 것보다 적게는 열 배, 많게는 백 배까지 이익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레를 사용하게 되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운송비용이 크게 줄어들며, 더 나아가서는 세곡운송에 들어가는 비용도 크게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수레 제작과 사용을 적극 제안하는 주장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당시 새로운 교통로가 개발되고, 그에 따라 상품유통량이 증가하고, 운송규모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물품 운송 과정에서 소나 말 또는 사람에 의존하던 것이 선박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점차 수레가 사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