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역사

시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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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전 시장

우리 나라에서 시장이 처음 열린 것은 신라 소지왕 12년(490년)의 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경주에 설치된 도시적인 시전인 경시(京市)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증왕 10년(509년)에는 동시(東市)를 설치하였고 효소왕 4년(695년)에는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하여 각기 시전(市廛)이라는 관리를 두어 시장을 감독하게 하였다. 중국 역사기록인 『신당서(新唐書)』의 신라전(新羅傳)에는 '신라의 시장에서는 모든 부녀자들이 장사를 했다' 라고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음이 묘사되어 있다. 그 당시는 패미, 즉 도정한 쌀이 화폐의 역할을 했다. 교통의 교차지점이나 성읍 안에서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일제시대의 학자인 문정창(文定昌)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는 장이 열리는 위치에 따라 네 종류의 시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로시(街路市) : 촌락과 촌락 사이의 인구 밀집지역에 형성된 일종의 촌락시
경계시(境界市) : 삼국시대의 78개 소읍(소읍) 간에 형성된 시
성읍시(城邑市) : 78개 읍 중 중심지에 형성된 시
제전시(祭典市) : 촌락 또는 읍민의 공동제례 때 부근에 형성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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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금속공방]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시장

고려시대에는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불교가 융성해지면서 농민과 상공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사원과 귀족에 예속되었다. 특히 불교가 융성해져 사원경제가 발달함으로서 사원이 확보하고 있는 토지나 노비의 수가 증대하였고 이를 팔아 부를 축적하였던 것이다. 또 곡물재배는 물론 소금의 생산과 판매, 술의 제조 등도 이들이 담당하였으며, 심지어는 고리대금업도 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가장 규모가 큰 시장은 국가에서 설치한 개성의 관설시전(官設市廛)으로, 외국사신의 왕래가 있을 때면 대시(大市)가 되었다. 이러한 시전들은 고려 중엽 이후 더욱 번창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송도(松都), 즉 개성에는 광화문에서 부민관(府民館)에 이르는 거리 양쪽에 공랑(公廊) 형식의 점포가 늘어서 있었는데 조선시대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행랑 중에는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遜) 등의 문구를 써붙인 점포들이 있었다. 송도에는 이러한 고정점포 외에도 부근의 일정한 장소에 노상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성의 주민들과 인근 농민들이 이를 이용하였다. 특히 외국의 사절이나 사무역업자(私貿易業者)들이 올 때면 큰 시장을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향시를 허시(墟市)라고 하였다. 허시는 결국 시장과 같은 의미이나 유통구조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던 당시로서는 각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장에 가지고 나와 필요한 물품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향시(鄕市)로는 성읍시(城邑市)가 있어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지역의 주민들이 이용했고, 교통의 요충지에는 주시(週市)가 열렸다. 또한 역로(驛路)제도가 실시되어 개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역이 설치되었고 그 주변에는 원(院)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본래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들을 위한 숙소였지만 행상인들이 이용하게 됨으로써 지방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화폐로는 포목이 주로 쓰였는데 개성에서는 경시서(京市署)라는 곳에서 검사업무를 담당하였고 어사대(御史臺)에서 감독하였다. 지방 군현의 경우에는 지방 관리들이 검사업무를 담당했고 안렴사(按廉使)가 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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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일반적 시장모습]

조선시대 시장

조선시대에는 특히 향시가 발달하였다.
조선 초 서울에서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성안 이곳 저곳에 매일장 형식의 노상시장이 생겨났다. 이것이 점차 증가하자 상품 종류별로 거래구역이 지정되었는데, 예를 들면 지금의 관철동과 장교 일대인 장통방(長通房)에 큰 시장이 설치되었고 그 밖에도 문전마다 조그만 시장이 형성되었다.

정종 원년(1399년)에 서울에 시전(市廛)이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좌우로 800여 칸의 행랑이 혜정교(惠政橋)에서부터 창덕궁 동구에까지 늘어섰다. 현재의 광화문 우체국 앞이 혜정교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이때의 시전은 개성으로 다시 서울을 옮기는 등 불안한 정세로 말미암아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다가 태종 10년(1410)부터 이루어진 건조사업으로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시전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 장사를 하는 대신 관에 필수품을 공급하는 상점이다. 그런데 전마다 규모가 달라서 이익이 많이 남는 곳을 골라 국역을 부담케 하였는바 이를 유푼각전[有分各廛]이라 하였고, 특히 국역을 가장 많이 부담하는 규모가 큰 여섯 개의 시전을 육의전(六矣廛)이라 하였다. 한편 규모가 작은 시전은 무푼각전[無分各廛]이라고 하여 국역을 면제받았다. 육의전은 국역을 많이 지는 대신 그에 상당하는 권한과 혜택을 누렸다.

조선시대의 향시로는 처음에는 6~7일 간격으로 서는 정기시가 많았으나, 이후 점차 5일 간격으로 줄어 1일 행정(行程), 즉 하루 왕복거리인 30~40리 마다의 교통 요충지에 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향시, 즉 지방의 장시는 15세기 말부터 삼남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기록상으로는 성종 1년(1470년)에 심한 흉년이 들어 전라도의 농민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듬해부터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서로 들고 나와 장을 열었는데 이것을 장문이라고 불렸다고 하는 것이 처음이다. 중종 때에 이르러 장시는 지방마다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계속해서 이를 억제하는 정책을 썼고 이로 인해 전국적인 유통망이 형성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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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장터 가운데 포목상들이 자리를 잡고, 그 둘레로 곡물 . 생선장수 등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쇠장이 서고 있다. 『기산풍속도첩』, 김준근 그림.

구분 주요내역 비고

성종1년(1470년)

장문(場門) 등장. 유통망 미형성

 

선조

5일 간격으로 각 지역 연결 시장권 형성

 

17세기 이후

사상인(私商人) 출현. 난전(亂廛) 발생

 

18세기

상품화폐 관계 발전, 금난전권(禁亂廛權) 철폐, 장세(場稅) 징수, 화폐 납부

 

일제시대 시장

우리의 시장은 개항을 전후하여 세계시장에 편입되었다'

조선의 전통적인 시장체계는 개항을 전후하여 점차 변질되어 갔고, 일제시대에 와서는 식민지정부의 개입과 한국에 와있던 일본인 상인들의 상권침해가 본격화되면서 그들의 요구에 맞게 왜곡되어 갔다. 특히 식민시대의 시장체계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따라 생산량 및 생산품목이 변화하고 육로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1914년에 일제는 시장규칙을 제정하여 종래의 시장을 재래시장, 식료품 판매시장, 수산물·청과 경매시장으로 나누었으며 모든 시장은 시·읍·면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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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의 유출] 사진은 야적장에 쌀가마니를 쌓아 놓은 군산항의 모습이다. 조선항을 개항시킨 일본은 자본주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도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할 목적으로 조선을 식량기지화 하여 쌀을 대량 유출해 갔다. 조선교육회편,『조선사진자료(朝鮮寫眞資料)』(1929).

<조선후기 시장 수의 변천>

구분 1770년 1808년 1830년 1908년 1926년 1976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101
157
216
278
82
134
68
28

102
157
214
276
82
134
68
28

93
158
188
268
109
143
51
42

102
162
216
283
82
134
68
28

107
142
190
314
122
224
111
146

95
189
235
442
?
?
85
?

1,064

1,061

1,052

1,075

1,356

※ 출처

동국문헌비고

만기요람

임원경제지

증보문헌비고

조선의시장경제

김성훈 저서

김성훈 저서는 『한국 정기시장의 제도와 기능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