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시장/특수시장

유명시장/특수시장

분류 정치/경제/생업 > 시장이란 > 시장의 구성

유명한 향시

서울 근교에서 사상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던 송파장
송파장(松坡場)은 『만기요람』에서 전국의 15대 장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고, 그 위치상 규모와 교역량이 적지 않았다. 송파장이 개설된 시기는 민진후(閔鎭厚)가 광주수어사일 때 창설된 것으로 보아 17세기 말엽 또는 18세기 초인 듯하며, 맨처음 개설된 곳은 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18세기 중엽에 송파로 옮겨갔다.
송파장이 설치된 이유는,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진보(鎭堡)와 창사(倉舍)를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해 유사시에 대비하게 했는데, 진보와 주민들이 가난해 의지할 바가 없으므로 시장을 개설하여 백성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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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진] 송파장은 동북지방과 삼남지방의 상품이 올라오는 길목에 위치하여 크게 번창하였다. 정선 그림.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

서울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있던 안성장
조선중기 이래 크게 발달한 지방시장 가운데 안성장(安城場)은 서울의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발달한 송파장이나 누원점, 그리고 신도시의 건설로 인해 번창하게 된 수원의 장시들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삼남의 각종 물화와 조세 등이 서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
안성은 유기(鍮器)라고 하는 상품이 생산됨으로서 시장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안성장시가 발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이라면, 송파나 누원점 등과는 달리 서울의 시전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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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안성읍내의 모습].『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

동북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크게 성장한 누원점
조선후기 서울 근교의 시장 가운데 큰 시장으로 발전한 것이 양주의 누원점(樓院店)이었다. 누원이 위치한 곳은 원격지 사이의 상품유통이 크게 확대되는 가운데, 특히 한양과 함경도 등지를 연결해주는 요충지였다. 누원은 본래 서울 외곾의 한적한 원촌(院村:원은 조선시대 역과 역 사이에 있던 국영 여관)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은 한양에서 함경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이 당시 최대의 소비지인 서울로 각 지방의 물화가 공급되면서 그 요충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크게 번창한 곳이었다.

수로와 해로를 연결하며 3대 시장 중 하나로 손꼽혔던 강경장
강경장(江景場)은 금강 하류에 위치해 있으면서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신흥 상업도시로 성장한 곳이었다.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강경은 자그만한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후반 이곳에 포자(鋪子)가 설치되면서 상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게 되었다. 강경장을 금강을 통해 육지의 상품을 선박으로 먼 거리까지 운송할 수 있는 이점을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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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강경장 모습].『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

정조의 화성 축조와 함께 발달한 수원의 시장
수원이 정치적 · 경제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크게 변화했다. 이전에는 수원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산업기반을 갖추지 못한 평범한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수원의 장시가 크게 발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멀지 않은 거리에 안성장이 개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성장은 삼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상품이 거쳐가는 길목에 있어 수원보다도 상품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수원은 서울과 안성-삼남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상품거래가 더욱 활기를 띨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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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장안문 앞]. 조선고적도보(1915년).

남해안에서 새롭게 성장한 마산장
마산장(馬山場)은 창원의 서쪽 마산포에 자리잡고 있던 항구도시였다. 마산포장 역시 『만기요람』에는 전국 15대 시장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마산장이 18세기 이래 급속하게 발전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1765년에 마산포에 마산창이 설치되고, 이곳에서 경상도 8개 군현의 조세를 집결시켰다가 한양으로 운반하면서 이곳이 상품유통의 거점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동북 해안지역과 남해안 지역의 상품유통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8세기 이후 상업도시로 성장한 마산장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5~6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마산장을 통해 유통되던 상품들은 소 · 면포 · 마포 · 면화 · 명주 · 명주실 등을 비롯하여, 종이 · 갓 · 망건 · 도자기 · 해사 · 명태 등이었다. 이와 같은 상품들은 경상도 남해안 일대의 각군현에서 생산되던 것으로 마산포에 조창(漕倉)이 설치되면서 이곳이 물화 집산지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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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마산항 전경].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

서울의 경시

육의전과 유푼전 무푼전
국역을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전안에 등록된 모든시전을 우선 크게 유푼각전[有分各廛]과 무푼각전[無分各廛]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유푼전은 다시 각 전의 크기와 경여 충실도 등에 따라 10푼부터 1푼까지 푼수를 정하여 국역을 응하게 했다. 유푼전은 모두37개 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여섯개의 시전을 육의전이라고 했다. 이 육의전은 서울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시전으로 육주비전(六注比廛), 육부전(六部廛), 육분전(六分廛), 육장전(六長廛), 육조비전(六調備廛), 육주부전(六主夫廛) 등 다양하게 불렸다.

<육의전의 구성 변천내용>

선조연간 영조대 정조대 순조대 19세기 중반

선전

선전

선전

선전

입전

면포전

면포전

면포전

면포전

면주전

면주전

면주전

면주전

면주전

백목전

지전

내어물전·청포전

지전

지전

저포전

저포전·내어물전

지전

저포전

저포전·포전

지전

청포전

저포전

포전

내·외어물전

내·외어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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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모습 1880년]. 『사진으로 본 조선시대』, 서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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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주비전] 종루의 싸전거리(1900년대 모습).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원천자료

<유푼각전>

구분 판매물품 위치

선전

비단(공단·대단·사단·우단등), 직물, 무명 옷감, 견직물

광통교 주변

면포전

무명, 한때은자도 팔았음, 강진목·해남목·상고목·군포목·공물목·무녀목

광통교, 종루 주변

면주전

명주

종루 주변

내외어물전

어물

내어물전(종루 주변), 외어물전(칠패-서소문 밖)

청포전

화포·홍포등 솜털로만든 옷과 담요, 털모자

 

지전

종이

 

저포전

모시

 

포전

남대문로 1가 주변

연초전

담배

 

상전

말총·가죽·초와 밀·실·이야기책

의금부 앞, 안국방 주변, 종루 남쪽 등

생선전

생선

종루 서쪽

미전

철물교 부근, 남대문 밖·서강·마포

잡곡전

보리·메밀·콩·조·밀

철물교 서쪽

경염전

소금·꼴뚜기젓·황석어젓

이현

유기전

놋그릇, 대접·주발·탕기·발탕기·양푼·쟁반·제기·접시·향로·요강·촛대

어물전 뒤쪽

은전

원래 술을 팔던 국전

병문 근처

의전

옷, 헌옷

종루 주변

면자전

씨를 뺀 솜

면자전

이전

가죽신

종루, 여러 곳 산재

화피전

각종 채색 물감, 중국 과일

종루의 동쪽

인석전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자리

수진방

진사전

당사·향사·갓끈·주머니끈

의금부 주변

청밀전

 

내장목전

굵고 긴 나무

도성 내외 여러 곳에 산재

철물전

철로 만든 각종 물건

 

연죽전

담뱃대

 

시저전

숟가락, 젓가락

종루 주변, 서소문 밖

우전

소를 팔거나 빌려주던 곳

 

마전

말을 팔거나 빌려주던 곳

동대문 안쪽

체계전

다리꼭지

광통교, 서소문 밖

<무푼각전>

구분 판매물품 위치

전립전

털로 만든 모자나 갓

 

이저전

쇠가죽 신창,짚신 가죽에 기름먹인 징신,당혜

입전동 주변

승혜전

짚이나 심으로 만든 미투리

 

시목전

땔감

 

바자전

바자(대·갈대·수수깡 등을 발처럼 엮거나 결은 물건)

 

고초전

지붕 잇는데 사용되는 볏짚

 

목기전

여러가지 나무로 만든 그릇

 

합회전

대합, 대합으로 만든 석회

 

족두리전

여자들 장신구

 

망건전

망건

서소문, 종루 주변

저전

돼지고기

도성 내외 70~80곳

병아리전

병아리

광통교 주변

치계전

꿩, 닭

광통교 주변

자반전

생선을 소금에 절인 반찬

도성 내외 여러곳

남문외해전

생선을 삭혀 만든 식혜나 새우젓

남문 밖

내외분전

밀가루 등 곡식가루

종루 주변, 서소문

백당전

엿, 사탕

 

염수전

간수(두부를 만들 때 필요한 간수)

염수전

복마제구전

말의 등자, 말안장

 

잡철전

석쇠·못·솥

 

침자전

각종 바늘

 

도자전

밀화단추·용잠·화잠·죽절잠·호두잠·나비잠·비녀·은지환·옥지환·노리개·댕기·귀주머니·굴레·조롱·염낭·은장도·참빗·얼레빗 등 각종 패물

종루 주변 노점

외장목전

가옥 건축용의 굵고 긴 나무

성밖

오리목전

가늘고 길게 오린 나무

 

우전

밤·배·잣·은행·모과·감·사과 등 과일

 

채소전

채소나 나물

 

잡전

우산·발·홰

 

세물전

잔치 등에 사용되는 사기그릇 등 각종 용기를 세를 받고 빌려줌

 

내외세기전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나 도구를 빌려주던 곳

 

양태전

갓양태

 

흑립전

옻칠을 한 검은색 갓

 

백립전

국상 때 일반인이나, 대상 뒤에 상인이 쓰는 흰 베로 만든 갓

 

초립전

관례를 치른 남자나 관아의 심부름꾼 등이 쓰던 누런 빛깔의 가는 풀로 결어 만든 갓

 

교자전

가마

 

종자전

각종 씨앗

 

염전

소금

 

초물전

왕골이나 볏짚으로 만든 물건이나 나막신 등

서소문 밖

특수시장

약령시
조선후기에는 각 지방의 장시뿐만 아니라 특수시장이 발달했다. 특수시장이라함은 일반시장과는 달리 거래되는 상품이 한정되어 있는 시장을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특수시장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약령시(藥令市)였다. 약령시는 말 그대로 각종 약재를 교환. 매매하는 시장을 말한다. 약령시는 대구 · 원주 · 전주 · 공주 · 진주 · 청주 · 대전 · 개성 등지에서 개설되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지속적으로 발달한 것은 대구약령시였다.

약령시는 영시라고도 하는데 장시와 마찬가지로 정기시장에 속했지만 성격이 달랐다. 장시는 매월 6회에 걸쳐 하루씩 장이 열리는 것이었지만, 약령시는 연2회 열렸고, 개시시간은 10일 이상이었다.그리고 전국의 의료업자들이나 상인들이 모여들어 대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지는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이유로 약령시를 특수시장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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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시장] 약령시는 영시라고도 하는데 장시와 마찬가지로 정기시장에 속했지만 성격이 달랐다.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

대구약령시
대구약령시가 전국에서 가장 크게 성정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여러가지였다. 먼저 대구는 경상좌 · 우도의 감영소재지로 행정도시로서뿐만 아니라,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이었기 때문에 크게 발흥할 수 있었다. 특히 낙동강과 금호강의 수운을 이용해 각종 생산물을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로 운송해 거래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대구에 인접한 여러 고을들이 모두 한약재의 명산지였다는 것이다. 즉 비교적 가까이에 위치한 고령 · 성주 · 칠곡 · 선산 · 의성 · 군위 · 영천 · 경산 · 청도 · 합천을 비롯해, 거리는 조금 멀지만 안동 · 영양 · 봉화 · 예천 · 문경 · 상주 · 김천 · 경주 등도 한결같이 한약재가 많이 생산되던 곳이었다. 여기에다 대동법의 실시로 한약재를 비롯한 각종 관수품은 시장을 통해 조달해야 했던 사회경제적 조건도 한 몫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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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약령시] 1907년 이후 약령시는 지금의 약전골목으로 불리는 남성로와 북성로 일대로 옮기게 되었다.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

고액이 오갔던 우시장
보통 우시장은 쇠전 · 쇠장 · 소시장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는 소 뿐만 아니라, 양이나 돼지 · 염소 같은 가축들의 거래도 겸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가축시장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재래시장 또는 5일장으로 불리는 조선시대의 시장에는 각종 전을 벌여놓고 있었다. 쇠전을 비롯하여 돼지전 · 닭전 · 곡물전· 옹기전 · 포목전 ·지전 · 어물전 · 과일전 · 유기전 · 철물전 · 가마전 · 자리전 · 갓전 · 신전 · 소쿠리전 · 채소전 · 약전 등의 좌판이 나름대로의 구역을 정해 자리잡고 있었다. 쇠전이라고 하면 장이 서는 날 소를 비롯한 가축들의 매매가 거래되는 곳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장시에는 쇠전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우시장에 관한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다. 단지 어느 장시의 우시장이 큐모가 크고 거래되는 두수가 많다는 정도일 뿐이다. 1918년 말 조사에 의하면, 당시의 전국 가축시장 수는 모두 655개소나 되었다. 이 시기는 조선시대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 때라 독립된 가축시장이 열리는 곳으로 볼 수 있다. 이중 경상북도가 91개소로 가장 많고, 강원도 67개소, 황해도63개소, 전라남도 58개소, 충청남도 52개소, 경상남도 및 평안도 50개소, 경기도가 47개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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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우시장]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라』, 김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