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마오쩌둥

[ Mao Zedong , 毛澤東(모택동) ]

요약 중국의 정치가. 중국공산당의 요직에서 활동하다가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으며, 장제스와의 내전에 승리하고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다. 국가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1949~1959)으로서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장제스[蔣介石]과 마오쩌둥[毛澤東]

장제스[蔣介石]과 마오쩌둥[毛澤東]

출생-사망 1893.12.26 ~ 1976.9.9
룬즈[潤之]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공산주의 이론
출생지 중국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
주요저서 《지구전론(持久戰論)》,《신단계론》,《신민주주의론》

자 룬즈[潤之]. 1893년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 사오산[韶山] 출생.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13세까지 《논어》와 《사서(四書)》 등을 읽었다. 16세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못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틈틈이 책을 읽다가 1909년 둥산[東山]고등소학에 들어갔다. 그 뒤 창사[長沙]의 샹샹[湘鄕]중학으로 옮겼고, 동맹회 《민립보(民立報)》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그 신문에 실린 반청론(反淸論)이나 혁명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공부나 외국 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를 만났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이던 1917년 그는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대부분이 제1사범학교 학생들이었고, 이 학회는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되었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 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수업을 청강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 학생 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 운동 발발 후 후난 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금지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0년 겨울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1921년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 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대장정, 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 등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 보고를 통해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그는 국민당과 1946~1948년의 내전에서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우고 국가 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反右派) 투쟁 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이 운동은 실패하였고 수천만 명의 인민들이 굶어 죽는 사태로 치달았다. 마오쩌둥의 권위가 추락하여 1959년 4월 국가 주석을 사임하게 되었고, 류사오치가 당주석이 되어 자작농을 부활시키려 했다.

1964년 4월 펑더화이가 실각한 후 린바오[林彪]가 국방장관에 취임하여 마오쩌둥을 숭배하고 찬양하였다. 그는 군부에서《마오쩌둥 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했으며 마오쩌둥의 사상을 홍보하는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마오쩌둥은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쩌둥 사상’을 전면에 내세웠다. 홍위병을 앞세운 문화대혁명을 통해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들을 물리치고 다시 권력을 잡았다.

1968년 10월 마오쩌둥은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고, 1969년 마오쩌둥과 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 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 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천안문 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이자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생애에서는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인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달성한 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개혁 정책인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난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평가된다. 특히 1981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중국 정부에서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내란이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 중국의 역대 주석

이 름 재임기간

제1대 주석

마오쩌둥

1949.10 ~ 1959.04

제2대 주석

류사오치

1959.09 ~ 1968.10

권한대행

쑹칭링
둥비우

1968.10 ~ 1981.05

제3대 주석

리셴녠

1983.06 ~ 1988.04

제4대 주석

양상쿤

1988.04 ~ 1993.03

제5대 주석

장쩌민

1993.03 ~ 2003.03

제6대 주석

후진타오

2003.03 ~ 2013.03

제7대 주석

시진핑

2013.03 ~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