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합작

국공합작

[ 國共合作 ]

요약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이룩한 2회의 협력관계.

제1차 국공합작(1924.1~27.7)은 북방의 군벌과 그 배후에 있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기 위하여 맺어진 것으로 국민혁명(북벌)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제2차 국공합작(1937.9~45.8)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통일전선을 결성한 것으로, 대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제1차 국공합작

제1차 국공합작은 1921년 7월 탄생한 중국 공산당은 그 해 제1기 전국대표대회 직후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혁명’을 성취할 목적으로 국민당과의 합작을 결정하였다. 이는 1920년 레닌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발표, 식민지 해방투쟁에서 부르주아의 역할을 중요시한 데 따른 것으로서 1920년경부터 반제(反帝) ·반봉건의 입장을 취해 오던 국민당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1923년 쑨원-이오페선언을 거쳐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공식적인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1924년 제1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연소(聯蘇) ·용공(容共) ·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국공합작이 발족되었으며, 공산당원은 그 당적을 보유한 채 개인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취하여 리다자오[李大釗] 등 3명이 중앙집행위원에, 마오쩌둥[毛澤東] 등 4명이 중앙집행위원 후보에 선출되었다. 이에 힘입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급속히 발전하였으며, 1927년 우한[武漢]에 혁명정권이 수립되기까지 하였는데, 이와 같은 좌파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한 장제스[蔣介石]는 1927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반공 우파 쿠데타를 감행함으로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러한 패배에 큰 타격을 입은 중국공산당은 토지혁명을 추진함으로써 농촌지역에서의 세력확장에 주력하였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을 지도자로 하는 장시성[江西省]의 ‘중화소비에트’를 성립시켜 난징[南京]정부에 대항하였다. 이에 따라 10년간에 걸친 국공내전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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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국공합작

제2차 국공합작은 장제스 군대의 장시[江西] 소비에트에 대한 포위를 벗어나 장정(長征)의 길에 오른 중국공산당은 1935년 8·1선언을 통하여, 만주사변 후 극심해진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제창하였다. 1936년 시안[西安]사건, 즉 북방의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공산당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찾아온 장제스를 감금하였다가 극적으로 석방한 사건을 계기로 내전반대 ·일치항일(一致抗日)이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국민당 역시 협력관계를 모색하게 되었으며, 1937년 7월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항일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공산당군은 팔로군(八路軍)·신사군(新四軍)으로 개칭되어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국민당은 합작에 두려움을 느껴 1938년경부터 적전내전(敵前內戰)이 시작되어 분열을 거듭하던 중 1945년 일본의 패망을 맞이하였다. 그 후 전면적인 내전에 돌입,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승리함으로써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국민당의 지도부는 타이완[臺灣]으로 패주하였다. 1981년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에 대하여 중국 양안[兩岸]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이 대등한 입장에서 교섭 ·제휴하자는 이른바 제3차 국공합작을 제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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