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차오 사건

루거우차오 사건

[ 蘆溝橋事件(노구교사건) ]

요약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충돌사건.
언제 1937년 7월7일
어디서 중국 루거우차오
누가 일본군
무엇을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중국군을 공격하여 다음날인 8일에 루거우차오를 점령

루거우차오는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융딩 강[永定河]을 가로지르는 루거우 교 왼쪽에 있는 작은 도시로, 당시 여기에 장쉐량 휘하 쑹저위안[宋哲元]이 이끄는 제29군(軍)의 일부가 주둔해 있었다.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난 후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사병은 용변 중이어서 20분 후에 대열에 복귀하였으나, 일본군은 중국군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켜 중국군을 공격하여 다음날인 8일에 루거우차오를 점령하고 중국군은 융딩강 우안(右岸)으로 이동하였다.

최초의 10여 발의 사격이 일본군의 모략에서 나온 것인지,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7월 11일에는 중국측의 양보로 현지협정(現地協定)을 맺어 사건은 일단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를 중국침략의 기회로 삼아 군대를 증파(增派)하여 28일 베이징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12월 13일 난징대학살을 자행하였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전면전쟁으로 확대되어 중 ·일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중국측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며, 중국 내 항일(抗日) 투쟁 의식이 높아졌다.

루거우차오 사건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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