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오치

류사오치

[ 劉少奇(유소기) ]

요약 중국의 정치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을 지내고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반마오쩌둥 실권파의 수령’ 으로 격렬한 비판을 받고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
출생-사망 1898.11.24 ~ 1969.11.12
국적 중국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후난성[湖南省]

후난성[湖南省] 출생. 1920년 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22년 중국노동조합 서기부 서기가 되었으며, 1923년부터 안위안[安源]노동조합 총주임이 되었다. 1925년 중화노동조합총연합회 결성과 더불어 부위원장이 되고, 그 후 상하이[上海]에서 5·30사건 등을 지도하였으며, 국공분열(國共分裂) 후에는 러시아의 동방대학(東方大學)에 유학하였다. 1932년 장시[江西] 소비에트구(區)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담당하고, 1936∼1942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베이팡국[北方局] 서기, 중위안국[中原局] 서기, 화중국[華中局] 서기 등을 지내면서 지하공작을 지도하였다.

1943년 옌안[延安]으로 돌아와 중앙서기처 서기,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고, 1945년 중국공산당 제7기 전국대표대회에서는 ‘당의 조직을 논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고,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부주석 ·중앙서기처 서기가 되어 마오쩌둥[毛澤東] 다음가는 이론가로 꼽혔다. 1948년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를 저술하고, 1949년 중앙인민정부위원회 부주석이 되었으며, 1954년 중국공산당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헌법 초안의 제안설명을 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6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1959년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에 이어 국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그의 기술 우선, 엘리트 존중 등의 사고방식은 점차 마오쩌둥의 사상과는 차이점이 있음이 드러났고, 1966년 이래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는 ‘반(反)마오쩌둥 실권파의 수령’ ‘중국의 흐루쇼프’로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1969년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정식으로 당에서 제명되고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그 후 덩샤오핑[鄧小平] 체제가 자리를 굳혀감에 따라 1980년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중전회(제5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그 폐막성명을 통하여 류사오치의 사후복권(死後復權)이 선언되었다.

● 중국의 역대 주석
이 름 재임기간

제1대 주석

마오쩌둥

1949.10 ~ 1959.04

제2대 주석

류사오치

1959.09 ~ 1968.10

권한대행

쑹칭링
둥비우

1968.10 ~ 1981.05

제3대 주석

리셴녠

1983.06 ~ 1988.04

제4대 주석

양상쿤

1988.04 ~ 1993.03

제5대 주석

장쩌민

1993.03 ~ 2003.03

제6대 주석

후진타오

2003.03 ~ 2013.03

제7대 주석

시진핑

2013.03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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