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중영전쟁

제1차 중영전쟁

요약 1840∼1842년 아편 문제를 둘러싼 청나라와 영국 간의 전쟁으로 '아편전쟁'이라고도 한다.
아편의 수입액과 은 유출액

아편의 수입액과 은 유출액

배경 및 원인

청과 영국의 무역불균형

청나라와 영국은 조공 무역의 형식에 기반한 제한적 무역인 광동무역체제에 따라 통상하였다. 청에서의 대외 무역은 광저우항[廣州港]에 한하며, 또한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단체(길드)를 통해서만 허가하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여러 나라 중에서 영국이 광저우 무역의 중심이었다. 중국의 주요 수출 품목은 비단·차(茶)·도자기 등이었는데, 18세기 말 영국 정부가 차에 대한 수입 관세를 인하하고부터 일반 국민 사이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보급되어 중국차(홍차)의 수입이 급증하였다. 차는 영국인들의 일상이 되었고, 중국산 공예품은 상류층에게 인기를 끌었다.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양의 비단·차(茶)·도자기 등을 수입하였지만, 반대로 중국으로의 수출은 약간의 모직물과 향료 정도밖에 하지 못하였다. 비단과 차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은(銀)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대(對)중국 무역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영국의 아편 밀수출

1832년까지 청나라와 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산(産) 목화와 아편을 밀수업자에게 수출함으로써 비단·차(茶)·도자기 등의 구매자금을 조달하려고 하였다. 중국에 밀수된 아편의 양은 해마다 격증하였다. 1830년대가 되자 아편 수입으로 인한 청나라의 은(銀)이 종전까지의 입초(入超, 수입초과)에서 출초(出超, 수출초과)로 바뀌게 되어, 청나라의 은 가격이 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본위화폐(本位貨幣)인 은화가 값비싸짐에 따라 청나라의 재정과 상업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상 동전(銅錢)을 사용하면서, 이것을 은으로 환산하여 납세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민에게 있어 동전에 대한 은가 비율의 고등(高騰)은 심각한 것이었다. 또한 관료, 군인, 농민 등 아편 중독환자의 격증은 전제왕조(專制王朝)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일하지 못하면 국가의 행정·국방에 공백이 발생하고, 재정수입이 급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편 중독환자의 발생을 막기 위하여 마련한 아편금지령은 담당 관료와 아편 밀수업자의 결탁 및 관료, 군인의 아편 중독 등으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에 몰리자 청나라의 도광제(道光帝, 선종)는 유명무실해진 아편금지령을 엄격히 시행하기 위하여, 강경한 아편금지론자로 알려진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欽差大臣, 황제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3품 이상의 관료)으로 임명하고 광저우에 파견하여 밀수를 근절하고자 하였다.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청나라 사람들에게 아편 중독자는 아편을 끊을 것과 관료 및 군인이 아편 밀수업자와 거래하거나 아편을 피우면 처벌할 것을 포고하였다. 또한 외국 상인들에게 아편을 피우거나 거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이며 보유한 아편을 청나라에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임칙서의 강경한 태도에 영국의 무역감독관 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은 아편을 모두 제출하였다. 임칙서는 압수한 아편을 전부 불에 태웠고, 상인들은 마카오[澳門]로 옮겨갔다. 마카오로 간 영국 상인들이 아편 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자 임칙서는 이들을 마카오에서도 추방시켰다. 영국 상인들은 홍콩에 주둔하였는데, 영국 군인이 중국인 임유희(林維喜)를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임칙서는 중국인을 살해한 영국인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되었고, 청나라는 영국과의 무역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기반을 잃은 영국 상인들은 영국 정부에 청나라와의 무역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로비하였다. 다만 아편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하고, 청나라의 영국에 대한 과격한 행동과 불공정무역을 내세우며 기업가들과 연대하였다. 영국은 자국의 명예와 자유무역을 위하여 무력을 통해 이 사태를 해결하려 하였다.

전쟁의 발발과 경과

1840년 6월 조지 엘리엇(George Elliot)이 이끄는 함선 48척과 병력 4,000명의 영국 함대가 청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공격을 예상한 임칙서는 광저우를 철저하게 무장한 상태였다. 영국 함대는 광저우를 공격하지 못하고 딩하이[定海] 등을 함락시켰다. 8월이 되자 영국 함대는 북상하여 베이징에 이르는 통로에 있는 다구[大沽]·톈진[天津]을 위협하였다. 청나라는 일단 휴전을 명하고 임칙서를 전쟁 도발자로 몰아 귀양보내고, 강화 교섭을 추진하였다. 청나라의 새로운 흠차대신은 기선(琦善)이었다. 기선은 영국과 강화 교섭하여 1841년 1월에 청의 홍콩 할양, 청의 아편 배상금 600만원 지불, 청나라와 영국의 평등한 관계 수립, 광저우 무역 재개 등을 골자로 하는 촨비가조약[川鼻 假條約]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양국은 가조약에 최종 서명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영국과의 평등한 관계 수립, 영토 할양 등에서, 영국은 배상금 600만원의 규모에서 불만족하였다. 특히 기선은 영토를 마음대로 할양하였다며 귀양가게 되었다. 1841년 8월 영국은 헨리 포틴저(Henry Pottinger)를 새로이 파견하였다. 그는 샤먼[廈門], 닝보[寧波]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청나라는 1842년 3월 지원군을 파병하여 샤먼, 닝보 등을 수복하고자 하였지만 영국에게 패배하였다. 6월에 영국은 상하이[上海]를 점령하고 양쯔강[揚子江, 長江]을 이용하여 7월에 난징[南京]에 육박하였다.

8월 10일 영국은 청나라에 마지막으로 협상을 제시하였고, 8월 19일 청나라의 기영(耆英)과 영국의 헨리 포틴저가 영국 함대 콘월리스호에서 만났다. 양국은 8월 29일 조약에 최종 서명하였다. 이를 난징조약[南京條約, =江寧條約]이라고 한다. 난징조약에 따라 청나라의 홍콩 할양, 5개 항구 개항 및 영사(領事) 주재, 청나라의 아편 및 전쟁 배상금 지급, 공행 폐지,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의 제한, 청나라와 영국의 대등한 관계 수립 등이 합의되었다.

제1차 중영전쟁 본문 이미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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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와 의의

난징조약의 체결로 제1차 중영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 1843년 7월, 10월에 청나라와 영국의 추가조약으로 영사의 재판권 인정과 수출입품의 세율 협정 및 개항장에 있어서의 조계(租界) 설치, 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 등이 합의되었다. 관세자주권 상실, 최혜국 대우, 영사 재판권 인정은 불평등 조약의 전형이었다. 영국과의 조약 이후, 청나라는 미국,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여 이들에게도 영국과 같은 대우를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구미 열강의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청나라 내부에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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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침략과 동아시아 3국의 개항 출처: dooped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