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티나의 역사

콘서티나의 역사

요약 콘서티나(Concertina)는 19세기 초반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발명되었다. 영국의 잉글리시 콘서티나는 주로 귀족계급에서 애호하던 악기였던 것에 반해, 독일의 저먼 콘서티나는 서민층의 사랑을 받던 악기였다. 특히 저먼 콘서티나는 19세기 중반 이후 전성기를 맞아 각종 밴드의 필수 악기로 구성되기도 하고 서구의 식민주의와 함께 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로도 전파되어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20세기 초반 다른 악기들의 등장과 나치의 정책으로 인해 콘서티나의 인기는 사그라들었으나 미국, 아일랜드,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여전히 대중적인 악기로 건재하였다. 1960년대 포크 음악의 부흥으로 콘서티나도 중흥기를 맞았고 현재는 세계 각국에서 전문 연주자 및 애호가들이 연주하고 있다.

1. 19세기의 콘서티나

콘서티나는 1830년 즈음 영국과 독일에서 각각 발명되었다. 영국과 독일의 콘서티나는 서로 다른 위상으로 당시 사회 속에 정착하였다. 영국의 잉글리시 콘서티나는 주로 상류사회에서 연주하는 악기였던데 비해 독일의 저먼 콘서티나는 하층계급의 악기로 인식되었다. 잉글리시 콘서티나는 예술음악의 악기로 인식되어 귀족의 응접실이나 연주회장에서 연주되었고 저먼 콘서티나는 평민들 사이에서 춤음악의 반주악기로 주로 사용되었다.

1) 초기의 콘서티나(1830~1850년)

잉글리시 콘서티나
영국의 휘트스톤은 1829년 “관악기의 구조”(Construction of Wind Instruments)라는 제목으로 콘서티나의 전신인 심포니엄에 대한 특허를 받았는데, 특허의 내용에는 콘서티나에 대한 아이디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심포니엄이나 콘서티나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악기명은 나중에 붙여졌다. 영국의 콘서티나는 원래 콘서티나라고 불렸으나 독일의 콘서티나가 등장하자 이와 구분하기 위하여 잉글리시 콘서티나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아래의 사진은 1833년에 휘트스톤이 제작한 잉글리시 콘서티나의 원형이다. 액션(action)이 노출되어 있으며 24개의 키가 달렸다. 양쪽 끝에 있는 엔드 플레이트(end plate)는 마호가니로 제작되었고 네 겹의 주름이 있는 풀무(bellows)가 있다. 가죽으로 된 엄지 스트랩(thumb strap)이 있어서 악기를 안정감 있게 잡을 수 있다. 리드 플레이트(reed plate)는 황동(brass)으로 만들어졌으며 팔레트(pallet)는 진주층(mother of pearl)으로 되어있다.

휘트스톤이 제작한 콘서티나 원형

휘트스톤이 제작한 콘서티나 원형

아래는 32개의 키가 달린 잉글리시 콘서티나이다. 1836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부터 팔레트가 노출되지 않고 나무에 문양을 만들어 리드 플레이트를 보호하는 프렛웍(fretwork)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래의 모델에는 장미목으로 만든 프렛웍이 부착되어있다.

32개의 키가 달린 잉글리시 컨서티나

32개의 키가 달린 잉글리시 컨서티나 1836년경 제작

휘트스톤은 콘서티나의 초기 모델을 제작한 후 1844년 콘서티나의 액션을 개량하는 아이디어를 담은 “진동 스프링을 이용한 콘서티나 액션의 개량”(Improvements in the Action of the Concertina, &c. by Vibrating Springs)이라는 제목으로 특허를 획득하였다.

아래는 이 특허를 적용하여 1848년경 휘트스톤사에서 제작한 콘서티나로 상아색 키에 장미목으로 만든 엔드가 있으며 프렛이 달려있다. 가죽으로 테두리를 한 풀무가 있으며 리드는 황동으로 제작되었다. 흰색 키와 검은색 키가 있는데 흰색은 온음계를, 검은색은 반음계를 연주할 때 사용한다. 리드는 은으로 되어있고 녹색 가죽의 엄지 스트랩이 있다.

이 시기부터 휘트스톤사에서 콘서티나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아래의 콘서티나는 대량 생산을 시작할 당시의 초기 모델이다. 당시 휘트스톤사에 있던 스위스 태생의 루이스 라쉬날(Louis Lachenal, 1821~1861)이 대량 생산의 기술을 개발하였다.

48개의 키가 달린 잉글리시 컨서티나

48개의 키가 달린 잉글리시 컨서티나 1848년경 제작

저먼 콘서티나
저먼 콘서티나는 독일 켐니츠 지방 출신의 울리히(Carl Friedrich Uhlig, 1789~1874)가 1834년에 발명하였다. 울리히는 본디 이 악기를 “새로운 종류의 아코디언”(new kind of accordion)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양쪽 끝에 각각 다섯 개의 버튼이 있는데 각 버튼은 두 개의 소리를 낼 수 있다. 따라서 20개의 혀(리드)가 있는 아코디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아래의 저먼 콘서티나는 울리히의 영향을 받아 1835년 찰스 유렌스타인(Charles Eulenstein)이 제작한 것이다. 저먼 콘서티나는 풀무의 수축과 이완에 따라 다른 음을 내는 바이소노릭(bisonoric)이 많은데 아래의 콘서티나도 바이소노릭 시스템이다.

10개의 키가 달린 저먼 콘서티나

10개의 키가 달린 저먼 콘서티나 1835년, 찰스 유렌스타인 제작

2) 콘서티나의 전성기(1850~1900년)

영국과 독일에서 각각 자리를 잡은 콘서티나는 멜로디와 반주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듀엣 시스템이 개발되면서 1850년대를 지나며 인기가 치솟았다.

잉글리시 콘서티나

아래는 1856년 런던의 『데일리 뉴스』(Daily News)에 실린 콘서티나의 광고이다. 이 광고에는 “특허를 받은 듀엣 콘서티나, 마호가니 박스에 담겨 있으며 멜로디와 반주를 동시에 할 수 있다. 이 악기는 성악과도 잘 어울리며 이 둘은 조합은 다른 어떤 악기에서도 얻지 못하는 소리를 만들어 낸다. 콘서티나에 대한 교습서와 에어(air)가 담긴 7권의 책이 판매 중이다. 콘서티나는 휘트스톤사에서 발명하여 특허를 받았으며 공공연주회에서 절찬리에 연주되고 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1856년 3월13일자 런던의 『데일리 뉴스』

1856년 3월13일자 런던의 『데일리 뉴스』

아래는 1870년경에 제작된 잉글리시 콘서티나이다. 화려한 꽃무늬의 프렛웍이 있으며 팔레트의 마개, 키, 핑거 레스트, 엔드 플레이트에 있는 볼트가 모두 금박으로 되어있다. 리드는 철(steel)로 되어있고 풀무는 다섯 겹이며 종이 재질에 녹색 가죽 테두리가 둘려있다. 목재로 만든 콘서티나의 케이스는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서 전시용으로도 효과적이었다.

잉글리시 콘서티나와 케이스

잉글리시 콘서티나와 케이스 1870년경 제작

저먼 콘서티나
가격이 저렴하고 대중적인 저먼 콘서티나는 19세기 후반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고 밴드 음악의 단골악기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영국,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구세군(Salvation Army) 밴드에는 콘서티나가 항상 편성되어 있었다.

미국과 아르헨티나 등지에서는 독일의 이민자들에 의해 켐니츠 콘서티나가 유입되어 널리 연주되었으며, 서구 세력이 식민지를 넓히는 과정에서 남아프리카에도 콘서티나가 들어오게 되었다. 세계 곳곳에 퍼진 콘서티나는 그곳의 문화와 어우러지며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저먼 콘서티나의 키 시스템은 울리히가 고안한 켐니츠 시스템(Chemnitzer system), 짐머만이 고안한 칼스펠트 시스템(Carlsfeld system), 반도네온에서 사용하는 라이니슈 시스템(Reinische system)의 세 종류가 있었다. 독일 콘서티나 제작자들은 키 시스템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으나 19세기 말에 켐니츠 시스템과 칼스펠트 시스템이 동일한 시스템으로 통일되었고 반도네온은 독자적인 시스템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구 시스템도 20세기 초반까지는 공존하였다.

2. 20세기 이후의 콘서티나

1) 콘서티나의 쇠퇴와 새로운 중심지의 부상

20세기에 접어들며 콘서티나의 인기는 점차 사그라들었다. 아코디언이 대량생산되면서 콘서티나의 자리를 대신하였고 20세기 초부터 유행했던 블루스나 재즈 음악에서는 콘서티나보다는 피아노를 더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파로 20세기 중반에는 소수의 콘서티나 제작자만이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콘서티나는 아일랜드, 아프리카, 미국,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남았다. 영국의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콘서티나는 아일랜드 지방과 서민층으로 고객층이 이동되었다. 특히 아일랜드가 콘서티나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1920년대에 윌리엄 뮤랄리(William J. Mullaly)를 시작으로 패디 머피(Paddy Murphy) 등의 걸출한 연주자들이 아일랜드의 콘서티나 전통을 굳건히 하였다. 영국에서는 전통 춤의 일종인 모리스 춤(Morris dancing)에서 잉글리시 콘서티나와 앵글로 콘서티나가 사용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19세기 후반 독일의 식민정책으로 아프리카에 온 독일인의 후예인 아프리카너(Afrikaners)들에 의해 유입된 저먼 콘서티나가 아프리카너들과 줄루족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아프리카 전역에서 사용되었다. 이들은 콘서티나를 스쿼시박스(squashbox)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폴카 음악에서 켐니츠 콘서티나가 사용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탱고 음악에서 콘서티나의 일종인 반도네온이 중요한 악기로 자리잡았다.

세계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 시기에 독일에서는 콘서티나와 반도네온이 편성된 밴드가 인기를 얻었으나 나치 치하에서 모든 클럽 음악이 금지되며 콘서티나 음악도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2) 포크 음악의 부흥과 현재

1960년대 포크 음악의 부흥으로 콘서티나는 중흥기를 맞았다. 특히 아일랜드는 패디 머피의 영향을 받은 노엘 힐(Noel Hill) 등의 연주자가 콘서티나의 전통을 이어갔다. 1980년대 이후에는 남미를 중심으로 탱고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며 콘서티나의 일종인 반도네온의 인기가 상승하기도 하였다.

콘서티나는 현재 영국이나 독일 외에도 이탈리아, 중국,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북아메리카 등지에서 연주된다. 콘서티나 연주자들은 ICA(International Concertina Association) 등의 단체를 통하여 온오프라인으로 교류하며 활동한다.

영국 요크(York) 지방 축제에서의 콘서티나 합주

영국 요크(York) 지방 축제에서의 콘서티나 합주 왼쪽부터 콘서티나, 피아노 아코디언, 아코디언

참고문헌

  • Dan M. Warrall. The Anglo-German Concertina Volume2: A Social History. Fulshear, Texax: Concertina Presss, 2009.
  • “Concertina.” .
  •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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