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문

김인문

분류 문학 > 인물 >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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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생몰년 : 629-694

일반정보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 아들이자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문명왕후(文明王后) 문희(文姬)이다. 『삼국사기』 열전에 입전되어 있어 그 생애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당(唐)에 전후로 7차례 들어갔고 총 22년간 숙위하였다. 통일전쟁기 대당외교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고구려 및 백제와의 전쟁에도 참여하였다. 현재 경주시 서악동에 전 김인문묘가 있다.

전문정보

김인문(金仁問)의 자(字)는 인수(仁壽)이고,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 아들이자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서현의 딸이자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명왕후(文明王后, 文明皇后, 訓帝夫人) 문희(文姬)이다. 김인문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본기?열전에 다수 전하는 편이며, 특히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조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조에는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 각간 문왕(文王), 각간 노차(老且), 각간 지경(智鏡), 각간 개원(愷元) 등이 모두 문희의 소생이라고 하였다. 또 여기서는 김인문이 태종무열왕 “5년 경신(660)”에 사신으로서 당에 들어가 군사를 청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종무열왕 6년(659)의 일이었다. 같은 책 권2 기이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에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668)에 문무왕이 인문?흠순과 함께 평양에 가서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이후 신라가 당에 반하려 하자 당 고종(高宗)이 인문 등을 불러 꾸짖고 옥에 가두고는 군사 50만을 보내 신라를 치려고 했다고 한다. 이에 김인문은 당시 당에서 유학하고 있던 의상(義相, 義湘)을 만나 이 사실을 신라에 알리도록 하였다. 신미년(671)에 당나라가 군사 5만으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인문은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과 함께 옥중에 있었으며, 이후 신라에서 강수(强首)에게 명하여 인문을 놓아달라는 표를 당에 올리자 황제가 그 표문을 보고 그를 놓아 보냈다고 한다. 또 인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국인(國人)이 그를 위해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고 하고 관음도량을 개설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해상에서 죽자 그 도량을 고쳐서 미타도량으로 삼았다고도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4 의해5 의상전교(義湘傳敎)조에도 인문의 이름이 보이는데, 여기서는 당나라에 가서 구금된 사람이 김흠순과 양도(良圖) 등이라고 하고는 세주에서 김흠순이 아니라 혹 김인문이라고도 한다고 언급하였다.

『삼국사기』 권44 열전4 김인문조에 따르면, 김인문은 어려서부터 유가(儒家)의 책을 많이 읽고 장자(莊子)?노자(老子)?불교(佛敎)의 설을 섭렵하였으며, 예서(隸書)와 활쏘기?말타기?향악(鄕樂)을 잘했고, 기예(技藝)가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서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였다고 한다. 또 당 하수량(賀遂亮)이 지은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에는 김인문은 “기질과 도량이 따뜻하고 온화하였고 사람됨과 식견이 침착하고 굳세었으며, 소인배의 자잘한 행동은 없고 군자의 고매한 풍모만 있어, 그 무공이 전쟁을 그치게 할 정도였고 문장 또한 유원(柔遠)하였다.(氣度溫雅 器識沈毅 無小人之細行 有君子之高風 武旣止戈 文亦柔遠)”라고 하였다.

김인문은 특히 통일전쟁기 당과의 외교관계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였는데, 이는 『삼국사기』 본기와 열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전후로 모두 7번 당에 들어갔고, 총 22년 동안 당에서 숙위하였다. 처음으로 당에 간 것은 진덕왕 5년(651, 당 영휘(永徽) 2년)으로, 그의 입당은 이전에 김춘추, 문왕, 법민 등이 행했던 대당외교 활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으며 당 고종은 그에게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김인문은 김문왕에 이어 두 번째 숙위였으며 그의 숙위는 조공과 인질이 결합된 형태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진덕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왕족인 김춘추의 아들이 파견되었을 것이므로, 이는 곧 김춘추 자신의 왕위에 대한 야망의 표시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신형식, 1986)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김인문은 진덕왕 7년(653) 당에서 귀국한 후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압독주(押督州: 경북 경산) 총관(摠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았고, 그 공으로 식읍 300호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본기에는 태종무열왕 3년(656)조에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와 군주(軍主)가 되어 장산성 쌓는 일을 감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진덕왕 7년(653)과 태종무열왕 3년(656) 사이에 김인문이 재차 당에 입당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 신라가 당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653년 11월과 655년 정월 2차례였는데, 그 중 김인문은 655년 정월의 견당사로 당에 갔을 것이며, 그 목적은 태종무열왕의 책봉에 대한 사은(謝恩), 당에 대한 군사 요청, 그리고 하정(賀正)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권덕영, 1994)

김인문은 태종무열왕 6년(659) 다시 입당하는데, 그 목적은 당시 신라가 여러 차례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자 당에게 군사력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종은 입당한 김인문을 불러 백제를 어느 길로 어떻게 공격해야하는지 묻고, 그를 신구도부대총관(神丘道副大摠管)으로 삼아 소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가 신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7년(660)조에 따르면 소정방은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러 태자 법민(法敏), 김유신과 합세하여 백제를 멸망시켰고, 의자왕과 왕자?대신 등을 포로로 잡아 당으로 돌아갔는데, 김인문도 이때 사찬 유돈(儒敦)?대나마 중지(中知) 등과 함께 소정방을 따라 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열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태종무열왕이 김인문을 파진찬(波珍?)으로 삼았다가 다시 각간(角干)의 위를 더하였으며, 김인문은 그 얼마 뒤에 다시 당에 들어가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인문은 그 다음해인 문무왕 원년(661, 당 용삭(龍朔) 원년) 6월 고구려를 정벌할 때 신라군을 징발하여 당을 도우라는 고종의 명을 전하기 위해 귀국하였고, 이때 문무왕은 인문과 유신에게 군사를 조련해 당군을 기다리게 하였다. 본기에 따르면 김인문은 문무왕 2년(662) 봄 정월에 김유신?김양도 등과 함께 당군이 있는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였고, 추격하는 고구려 군대와 싸워 1만 명을 참수하였으며 그 전공으로 김유신과 더불어 본피궁(本彼宮) 재화와 전장(田莊), 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그 해(662) 7월, 김인문은 다시 당에 사신으로 들어가 방물(方物)을 바쳤는데, 이는 문무왕이 즉위한 후 당이 조문 겸 책봉사를 보내 문무왕을 책봉하자 이에 대한 사은의 의미로 파견한 것인 듯하며 하정사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에는 당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장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김인문이 다음해인 문무왕 3년(663) 김유신?천존(天存)?죽지(竹旨) 등과 함께 백제부흥군 토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무왕 5년(665) 8월에는 당의 유인궤(劉仁軌)가 문무왕?부여융과 함께 취리산(就利山)에서 회맹하고 곧이어 신라?백제?왜?탐라의 사신을 데리고 당에 들어갔는데, 김인문은 이때 다시 당에 들어갔던 듯하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열전에서는 김인문이 건봉(乾封) 원년 즉 문무왕 6년(666) 당 고종을 따라 태산의 봉선(封禪) 의식에 참여하고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제수받았으며 식읍 400호도 함께 받았다고 하였으므로, 이 내용을 참고하면 문무왕 5년 회맹 이후 당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권덕영, 1994)

문무왕 8년(668, 당 총장(總章) 원년) 당 고종은 이적(李勣)을 보내 고구려를 치는 한편 김인문을 보내 신라도 군사를 징발하게 하였다. 그는 6월 12일 당항진에 도착한 유인궤의 군사를 맞이해 평양을 공격하여 9월 21일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때 이적은 고구려왕과 왕자?대신들을 포로로 잡아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助州) 등이 이적을 따라 함께 들어갔다. 열전에서는 문무왕이 인문에게 죽은 대탁각간(大琢角干, 탁(琢)자는 잘못 들어간 것인 듯) 박뉴(朴紐)의 식읍 500호를 내렸으며, 당 고종도 그에게 작위를 더하고 식읍 2,000호를 주었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지은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光塔碑)」에는 왕자 김흔(金昕)의 말에 “지금 웅천주 서남쪽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나의 조상인 임해공(臨海公, 김인문)께서 봉토로 받은 곳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김인문이 국가에서 받았던 식읍이 김흔에게까지 이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김수태, 1999) 그러나 김인문이 죽은 이후 식읍은 회수되었을 것이므로, 성주사에 대한 김흔의 언급은 상징적인 의미밖에는 없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조범환, 2001)

이후 문무왕이 백제의 옛 땅을 점령하고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당에 대항하자, 문무왕 14년(674)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없애고 대신 당에 머물고 있던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유인궤가 이끄는 신라 정벌군과 함께 귀국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무왕 15년(675)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자 당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이에 김인문은 중간에 당으로 돌아가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봉해졌다. 열전에서는 김인문이 신라왕으로 봉해지는 것을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고종이 들어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당시 김인문의 정치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주장이 있는데, 곧 김인문이 친당파였다는 견해와 그렇지 않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문무왕 11년(671)조에 실려 있는 설인귀(薛仁貴)의 서신 중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었다”라는 구절에 주목하면서, 이때의 아우는 김인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김인문이 문무왕과는 달리 당의 한반도 분할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신하로 지칭하였던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당에서 문무왕을 대신할 인물로 김인문을 보낸 것도 그가 한반도 분할통치정책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였기 때문이었다고 보았다.(권덕영, 1994) 반대로 후자의 입장에서는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에서는 김인문이 투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상을 통해 당의 신라 침공 사실을 신라 조정에 미리 알렸다고 하였고, 또 당에서 문무왕을 대신하여 그를 보내려고 하자 인문이 극구 사양하였다고 했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료를 보면 그는 친당적 인물일 수 없으며, 나아가 신라 왕위에도 욕심이 없었다는 것이다.(김수태, 1999)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조에서는 김인문이 신라로 돌아오다가 해상(海上)에서 죽었다고 했지만,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김인문은 신라로 귀국하다가 중로에서 당으로 돌아간 뒤 문무왕 19년(679, 당 조로(調露) 원년) 진군대장군행우무위위대장군(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이 되었고, 신문왕(神文王) 10년(690, 당 재초(載初) 원년)에는 보국대장군상주국임해군개국공좌우림군장군(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에 제수되었다가 효소왕(孝昭王) 3년(694, 당 연재(延載) 원년) 4월 29일 당나라 장안에서 병으로 죽었으며, 이때 나이는 66세였다고 하였다. 이에 당 중종은 그에게 수의를 내리고 관등을 더해주고는, 육원경(陸元景) 등으로 하여금 영구(靈柩)를 호송하게 하였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효소왕 4년(695, 당 연재(延載) 2년) 10월 27일에 신라 왕경(王京: 경주)의 서원(西原)에 장사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김인문묘의 위치에 대해서는 1931년 일본인 유광교일(有光敎一)이 경주 서악서원(西岳書院) 구내 영귀루(永歸樓) 북쪽 축대에서 김인문의 묘비로 보이는 비편 하나를 발견하여, 열전의 “서원(西原)”이 서악서원 부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이곳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는 “각간묘(角干墓)”로 불리던 고분과 귀부가 남아 있었는데, 서악서원에서 발견된 김인문묘비의 비편 크기를 실측해본 결과 각간묘 옆의 귀부 비혈(碑穴) 크기와 거의 일치하였으므로, 각간묘를 곧 김인문묘로 추정하게 되었다. 즉 본래 김인문 묘비는 각간묘 귀부에 세워져 있었는데, 후일 그것이 파손되자 그 일부가 서악서원으로 옮겨졌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藤田亮策, 1932; 박일훈, 1968)

그러나 김인문묘비가 각간묘의 비혈에 들어맞는다고 해서 반드시 양자가 관련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각간묘를 김인문묘로 속단할 수는 없으며, 김인문묘는 원래 서악서원자리에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봉분이 없어지게 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6) 최근에는 각간묘를 곧 김인문묘로 보는 입장에 서면서 김인문묘가 화장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나오기도 하였다. 김인문은 694년 4월 29일에 죽었는데 그가 본국에 송환되어 경주 서원에 묻힌 것은 695년 10월 27일이었으므로 그의 주검은 화장되었을 것이며, 그 후 아버지인 태종무열왕묘 근처에 묘가 조성되었고 석비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권덕영, 2004)

김인문의 후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전하는 바가 없으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光塔碑)」에서 김흔이 김인문을 “오조(吾祖)”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때, 그를 김인문의 자손으로 볼 수 있으며, 김흔이 김양의 종형(從兄)이므로 김양 역시 김인문의 후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또 김양의 증조인 김주원의 아버지 유정(惟正)은 김인문의 증손에 해당하므로 김주원의 아들인 종기(宗基)와 헌창(憲昌), 그리고 그의 자제들은 모두 김인문의 후손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한다.(권덕영, 2004)

참고문헌

藤田亮策, 1932, 「新羅金仁問墓碑の發見」『靑丘學叢』7.
박일훈, 1968, 「金庾信墓와 金仁問墓」『考古美術』100.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신형식, 1986,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권덕영, 1994, 「悲運의 新羅 遣唐使들-金仁問을 중심으로」『新羅의 對外關係史 硏究』(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5).
김수태, 1999, 「羅唐關係의 變化와 金仁問」『白山學報』52.
조범환, 2001, 『新羅禪宗硏究-朗慧無染과 聖住山門을 중심으로』, 일조각.
권덕영, 2004, 「金仁問小傳」『文化史學』2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太宗春秋公
第二十九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 ?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 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初文姬之?寶姬 夢登西岳捨溺 ?滿京城 旦與妹說夢 文姬聞之謂曰 我買此夢 ?曰 與何物乎 曰 ?錦裙可乎 ?曰 諾 妹開襟受之 ?曰 疇昔之夢 <傳>付於汝 妹以錦裙酬之 後旬日 庾信與春秋公 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 乃崔致遠之說] 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 故踏春秋之裙 裂其襟紐曰 請入吾家縫之 公從之 庾信命阿海奉針 海曰 豈以細事輕近貴公子<乎> 因辭[古本云 因病不進] 乃命阿之 公知庾信之意 遂幸之 自後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之曰 爾不告父母 而有娠何也 乃宣言於國中 欲焚其妹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何烟 左右奏曰 殆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侍在前 顔色<大>變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救之 公受命馳馬 傳宣沮之 自後現行婚禮 眞德王薨 以永徽五年甲寅卽位 御國八年 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葬於哀公寺東 有碑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太子法敏 角干仁問 角干文王 角干老且 角干智鏡 角干愷元等 皆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 現於此矣 庶子曰 皆知文級干 車得令公 馬得阿干 幷女五人 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饍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 城中市價 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 民謂之聖代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時百濟<末>王義慈乃<武>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以貞觀十五年辛丑卽位 耽?酒色 政荒國危 佐平[百濟爵名]成忠 極諫不聽 囚於獄中 瘦困濱死 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審擇其地 處上流而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 沈峴 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顯>慶四年己未 百濟烏會寺[亦云 烏合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寺行道 二月 衆狐入義慈宮中 一白狐坐佐平書案上 四月 太子宮雌?與小雀交婚 五月 泗>[扶餘江名]岸大魚出死 長三丈 人食之者皆死 九月 宮中槐樹鳴如人哭 夜鬼哭宮南路上
태종춘추공
제29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성은 김씨이다. 용수[또는 용춘라고도 한다]각간 추봉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로, 곧 유신공의 막내 누이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흘러서 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아우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문희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습니다.”라고 했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겠느냐?”라고 하니,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려 받았는데,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라고 하니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후에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위의 사금갑(射琴匣)조에 보이는데, 최치원(崔致遠)의 설이다]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다가[신라 사람들이 말하는 축국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이른다] 고의로 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떼어버리고 말하기를 “청컨대 우리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명하여 꿰매드리라고 하니, 아해가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로써 귀공자를 가벼이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사양하였다.[고본(古本)에는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에게 명하였더니 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관계하였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이 그의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어 말하길 “네가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고, 이에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리고 누이를 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것을 기다려, 뜰 가운데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가 아뢰기를 “아마도 유신이 그의 누이를 태우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의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짓인가?”라고 하였는데, 마침 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이 한 일이니 가서 구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이를 막고, 그 후 드러내어 혼례를 행했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 5년 갑인(654)에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더불어 지모와 힘을 합해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사직(社稷)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 각간 문왕(文王), 각간 노차(老且), 각간 지경(智鏡), 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 거득(車得) 영공(令公) 마득(馬得) 아간과 딸을 합하여 모두 5명이다.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였는데, 경신년(660)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는 점심은 하지 않고 다만 조석만 들 뿐이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 성 중 시장의 값은 베 한 필에 조(租) 30석 혹은 50석이었다.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했다. 동궁에 있을 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갔더니, 당나라 황제가 그 풍채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굳이 머물러두고 시위(侍衛)하게 했으나, 힘써 청하여 이에 돌아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정관(貞觀) 15년 신축(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 정사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좌평(佐平)[백제의 관작 이름] 성충(成忠)이 극력으로 간해도 듣지 않고 옥에 가두니, 몸이 여위고 지쳐 거의 죽게 되었다. 글을 써서 아뢰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겠습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할 것이니, 상류에 머물러 적을 맞이하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해처이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곧 장암(長?)이니 또는 손량(孫梁), 혹은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은 연후에 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살피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하루 종일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떼가 의자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부여의 강 이름]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이었으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의 괴수(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우는 것과 같았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 위에서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