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원

김주원

분류 문학 > 인물 >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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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 하대 진골 귀족.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하대 진골 귀족으로, 원성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실패하고 명주(溟州)로 낙향하였다. 아들로는 종기(宗基)·헌창(憲昌)이 있으며, 종기의 아들 정여(貞茹)·장(璋),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 정여(貞茹)·장(璋)의 아들인 양(陽)과 흔(昕)이 신라 하대에 활동하고 있다.

전문정보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하대 진골 귀족으로,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조에서는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주원이 냇물이 불어나 북천(北川)을 건너오지 못하게 됨에 따라 경신(敬信)이 왕위에 오르고 주원은 명주(溟州)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즉위년(785)조에서도 선덕왕(宣德王)이 아들이 없이 죽자 군신(群臣)이 왕의 족자(族子) 주원(周元)을 세우려 하였으나, 때마침 큰 비로 알천(閼川)이 불어나 서울 북쪽 20리에 살던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여 전왕(前王)의 아우인 상대등(上大等) 경신(敬信)이 대신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인물조에서도 여러 신하가 주원(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경신(敬信)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 왕이 되었으며 주원은 스스로 명주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김주원과 김경신(원성왕)사이에 무력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된 것은 『삼국유사』·『삼국사기』에서와는 다르다. 위와 같은 사료들은 신라 제37대 선덕왕(宣德王)이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김경신(金敬信, 원성왕)이 왕위를 놓고 대립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때 먼저 왕위 계승자로서 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인물은 김주원이었으나, 실제로 즉위한 것은 김경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주원은 일찍이 혜공왕(惠恭王) 13년(777) 10월에 이찬(伊飡)으로 시중(侍中)에 취임하였으며, 제37대 선덕왕(宣德王)이 즉위한 직후인 780년 4월까지 시중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조에서는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김주원이 상재(上宰)로, 상대등(上大等)이었던 김경신이 이재(二宰)라고 명기되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상재(上宰)나 차재(次宰)는 관직의 고하(高下)로는 볼 수 없으며(이기백, 1974), 실제 재상직(宰相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왕위계승의 제1, 제2후보라는 의미를 가졌거나(최병헌, 1976), 병부령(兵部令)을 겸한 더 큰 세력으로 김주원을 상재(上宰)라고 칭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신형식, 1977) 이에 반하여 특수한 재상제도로 국가기구의 테두리를 초월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거나(木村誠. 1977), “상재(上宰)”는 상대등·시중보다 상위에 있는 최고집정관(最高執政官)의 호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동, 1984)

이와 관련하여 김주원과 김경신(원성왕)의 대립은 김주원 세력이 김경신 세력보다 컸으나, 결국 김경신이 상대등이 가지는 정치적 힘으로써 억지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74) 이에 따르면 김경신(원성왕)은 즉위 후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위해 외형상 국인에게 추대 받는 설화를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김창겸, 2003) 그러나 김경신이 김주원보다 혈연적, 정치적 우위에 있었으며(권오영, 1995), 김주원이 자신의 일부 지지 세력을 이용해 더 많은 지지 세력을 가진 김경신에게서 무력적으로 찬탈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김수태, 1996)

한편, 김주원과 김경신의 대립을 무열왕계와 내물왕계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주원은 무열왕의 6세손으로 시중과 상대등의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던 유력한 가문이었다. 김경신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이기동, 1984),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혜공왕대 김양상과 관련을 맺으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김주원과 김경신은 이전에 반혜공왕파의 입장에서 김양상(金良相, 선덕왕)의 즉위를 도왔다. 하지만 선덕왕은 즉위 후 무열왕계인 김주원 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왕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김경신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김주원 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이들의 경쟁관계는 선덕왕대 말에 더욱 고조되어 결국 왕위계승에서 김경신이 승리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김경애, 2006)

김주원의 가계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어 왔다.『삼국사기』권44 열전4 김양조에서는 김주원이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6세손으로,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에서는 김인문(金仁問)이, 김주원의 증손자인 김흔(金昕)의 조(祖)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을 김주원의 직계조상으로 보기도 한다.(이기동, 1984)

그러나 강릉김씨족보에 의하면 김주원의 가계는 무열(武烈)-문왕(文王)-대장(大莊)-사인(思仁)-유정(惟正)-주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장, 사인, 유정은 각각 『삼국사기』에서 그 행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김주원계는 무열왕부터 경덕왕대에 걸쳐 신라 최고 관직인 시중(문왕, 대장, 유정)과 상대등(사인)을 차례로 역임하는 집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주원의 선계(先系)인 사인이 경덕왕 6년(747)에 한화정책(漢化政策)에 대한 비판을 하다가 퇴직을 당하였으며, 유정이 역시 경덕왕 4년(745)에 천변지이(天變地異)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난 것으로 추측 된다.(이기백, 1974) 사인-유정대에서부터 김주원계는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반왕적(反王的)이면서 귀족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이후 명주 세력과 결탁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정숙, 1984)

김경신이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자 김주원은 명주(溟州)로 퇴거하였으며, 이에 명주는 김주원 세력의 연고지가 되고 있다. 강릉김씨족보에 따르면 명주는 김주원의 아버지인 유정(惟正)이 토착세력인 박씨와 혼인을 맺으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던 곳으로 전하며,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강릉대도호부 인물조에 의하면 “2년 후에 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근을어(斤乙於)·울진(蔚珍) 등 고을을 떼어서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자손이 인하여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하였다.”고 하여 이후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식읍을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한 것에 대해, 이는 원성왕이 무열왕계 세력을 정치사회적으로 배려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원성왕이 김주원의 아들 종기(宗基)와 헌창(憲昌), 종기의 아들 장여(璋如)를 시중에 임명하였고, 오묘에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을 모시고 있으며, 또한 명주 일대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보아, 김주원의 명주 퇴거 이면에는 김경신과의 모종의 타협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창겸, 2003)

그러나 김주원이 명주군왕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김주원이 식읍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전기 명족의식(名族意識)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강릉의 거족(巨族)인 강릉김씨는 자신들의 시조인 김주원을 현장(顯彰)하고자 명주군왕으로 칭하고 많은 식읍을 받았다고 기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봉호의 방식으로 식읍이 주어진 것과는 달리 김주원에게는 봉토로 주어졌고, 김주원의 식읍이 지나치게 넓은 점, 신라 최고위층 경주 진골인 유정(惟正)과 지방토착세력인 박씨와의 결혼이 골품제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고 하였다.(김흥삼, 2008)

김주원계는 원성왕에 의하여 정계에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명주에 정착하여 지방세력으로서 성장하여 신라말 고려초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삼국사기』 권44 열전4 김양조에 의하면 김주원에게는 아들 종기(宗基)와 헌창(憲昌)이 있으며, 종기의 아들로는 시중을 역임한 정여(貞茹)와 장여(璋如)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헌창과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은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각각 헌덕왕 14년(822)·헌덕왕 17년(825) 난을 일으키고 있다. 김정여(金貞茹)의 아들 김양(金陽)과 김장여(金璋如)의 아들 김흔(金昕)은 김명(金明)과 김우징(金祐徵)의 왕위쟁탈전에서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김흔이 민애왕(閔哀王, 김명)의 편에 선 반면, 김양은 김우징의 편에 서서 민애왕(閔哀王, 김명)파에게 승리하고 김우징(신무왕)을 왕위에 앉게 하고 있다. 이러한 좁은 가계에서의 정치적 대립은 신라하대 가계 분지화(分枝化)와 관련하여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이기동, 1984)

김주원 계보도

주원(周元)

종기(宗基)
헌창(憲昌)

범문(梵文)
장여(璋如)
정여(貞茹)

흔(昕)
양(陽)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최병헌, 1976, 「新羅 下代의 動搖」『한국사』3.
木村誠, 1977, 「新羅の宰相制度」『人文學報』118, 東京都立大學.
신형식, 1977, 「武列王權의 成立과 活動」『韓國史論叢』2.
김정숙, 1984, 「金周元世系의 成立과 그 變遷」『白山學報』28.
이기동, 1984, 『新羅 下代 王位繼承과 政治過程』, 일조각.
권영오, 1995, 「新羅 元聖王의 즉위과정」『釜大史學』19.
김수태, 1996, 『新羅中代政治史硏究』, 일조각.
김창겸, 2003, 『新羅 下代 王位 繼承 硏究』, 경인문화사.
김경애, 2006, 「新羅 元聖王의 卽位와 下代 王室의 成立」『韓國古代史硏究』41.
김흥삼, 2008, 「신라말 ?山門 梵日과 金周元系 관련설의 비판적 검토」『韓國古代史硏究』5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
元聖大王
伊<飡>金周元 初爲上宰 王爲角干 居二宰 夢脫?頭 著素笠 把十二絃琴 入於天官寺井中 覺而使人占之 曰脫?頭者 失職之兆 把琴者 著枷之兆 入井 入獄之兆 王聞之甚患 杜門不出 于時阿<飡>餘三 或本 餘山 來通謁 王辭以疾不出 再通 曰 願得一見 王諾之 阿<飡>曰 公所忌何事 王具說占夢之由 阿<飡>興拜曰 此乃吉祥之夢 公若登大位而不遺我 則爲公解之 王乃?禁左右而請解之 曰脫?頭者 人無居上也 著素笠者 冕旒之兆也 把十二絃琴者 十二孫傳世之兆也 入天官井 入宮禁之瑞也 王曰 上有周元 何居上位 阿<飡>曰 請密祀北川神 可矣 從之 未幾 宣德王崩 國人欲奉周元爲王 將迎入宮 家在川北 忽川漲不得渡 王先入宮卽位 上宰之徒衆 皆來附之 拜賀新登之主 是爲元聖大王 諱敬信 金<氏> 蓋厚夢之應也 周元退居溟州 王旣登極 時餘山已卒矣 召其子孫賜爵 王之孫有五人 惠忠太子憲平太子禮英?干大龍夫人小龍夫人等也 大王誠知窮達之變 故有身空詞腦歌[歌亡未詳] 王之考大角干孝讓 傳祖宗万波息笛 乃傳於王 王得之 故厚荷天恩 其德遠輝 貞元二年丙寅十月十一日 日本王文慶[按日本帝紀 第五十五<代>文德王 疑是也 餘無文慶 或本云 是王太子] 擧兵欲伐新羅 聞新羅有万波息笛退兵 以金五十兩 遣使請其笛 王謂使曰 朕聞上世眞平王代有之耳 今不知所在 明年七月七日 更遣使 以金一千兩請之曰 寡人願得見神物而還之矣 王亦辭以前對 以銀三千兩賜其使 還金而不受 八月 使還 藏其笛於內黃殿 王卽位十一年乙亥 唐使來京 留一朔而還 後一日 有二女 進內庭奏曰 妾等乃東池靑池[靑池卽東泉寺之泉也 寺記云 泉乃東海龍往來聽法之地 寺乃眞平王所造 五百聖衆五層塔幷納田民焉]二龍之妻也 唐使將河西國二人而來 呪我夫二龍及芬皇寺井等三龍 變爲小魚 筒貯而歸 願陛下勅二人 留我夫等護國龍也 王追至河陽館 親賜享宴 勅河西人曰 爾輩何得取我三龍至此 若不以實告 必加極刑 於是出三魚獻之 使放於三處 各湧水丈餘 喜躍而逝 唐人服王之明聖 王一日請皇龍寺 注 或本云 華嚴寺 又金剛寺 {香}蓋以寺名經名{光}混之也 釋智海入內 <講>華嚴經五旬 沙彌妙正 洗鉢於金光井[因大賢法師得名]邊 有一?浮沈井中 沙彌每以殘食?而爲戱 席將罷 沙彌謂?曰 吾德汝日久 何以報之 隔數日 ?吐一小珠 如欲贈遺 沙彌得其珠 繫於帶端 自後大王見沙彌愛重 邀致內殿 不離左右 時有一?干 奉使於唐 亦愛沙彌 請與俱行 王許之 同入於唐 唐帝亦見沙彌而寵愛 <丞>相左右莫不尊信 有一相士奏曰 審此沙彌 無一吉相 得人信敬 必有所持異物 使人檢看 得帶端小珠 帝曰 朕有如意珠四枚 前年失一個 今見此珠 乃吾所失也 帝問沙彌 沙彌具陳其事 帝內失珠之日 與沙彌得珠同日 帝留其珠而遣之 後人無愛信此沙彌者 王之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 有崔致遠撰碑 又創報恩寺 又望德樓 追封祖訓入?干爲興平大王 曾祖義官?干爲神英大王 高祖法宣大阿干爲玄聖大王 {玄聖大王}玄聖之考 卽摩叱次?干
원성대왕
이찬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이재(二宰)의 자리에 있었는데, 꿈에 머리에 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썼으며, 12현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말하기를, “두건을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이며,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고 하는 이가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연락하여 말하기를, “꼭 한 번 뵙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찬이 묻기를,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하니, 왕이 꿈을 점쳤던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아찬은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이는 매우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큰 자리에 올라서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해몽을 청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두건을 벗은 것은 위에 앉은 이가 없음이고,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 자손에게 왕위를 전할 징조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위에 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비밀리에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지내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그대로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상재(上宰)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따르고 새로 오른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은 김씨이니 대개 길몽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州)로 물러나 살았다. 왕이 등극했으나, 이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자손이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달하는 이치를 알게 되었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孝讓)이 선조때부터 지녀온 만파식적(万波息笛)을 왕에게 전하였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그 덕이 멀리 빛났다. 정원(貞元) 2년 병인(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군주인 문덕왕(文德王)이 이 임금인 듯하다. 이 밖에 문경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라고 하였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철퇴하고, 사자를 보내 금 50냥으로 피리를 (보자고) 청하였다. 왕이 사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기에는 상대 진평왕(眞平王)때에 그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 금 1천냥으로 청하기를, “과인이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전과 같은 대답으로써 이를 거절하고 은 3천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직하였다. 왕이 즉위한지 11년 을해(795)에 당의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와서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지(東池), 청지(靑池)[청지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 샘은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을 듣던 곳이고, 절은 바로 진평왕이 세웠으며, 5백 성중(聖衆)과 5층탑과 전민(田民)을 아울러 헌납했다고 하였다.]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의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호국룡을 머무르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주자 각각 물 속에서 한 길이나 솟구치고 기뻐 뛰놀면서 가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하고 거룩함에 감복하였다. 왕이 어느날 황룡사(皇龍寺) 주: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라고 했고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했는데, 아마 절 이름과 불경의 이름을 혼동한 것 같다. 이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강론하게 하였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번 금광정(金光井)[대현(大賢) 법사로 인해 지어진 이름이다]가에서 바리때를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매번 먹다 남은 밥을 주면서 장난 하였다. 법석이 끝날 무렵 사미가 자라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지가 오래인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주려는 듯 하므로, 사미는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후로부터 대왕은 사미를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잡간 한 사람이 당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사미를 사랑하여 같이 가기를 청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이들이) 함께 당에 들어가니 당의 황제도 사미를 보고 사랑하게 되었고, 승상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한 관상보는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이 사미를 살펴보니 한 군데도 길한 상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있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짐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었는데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다.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미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사미는 그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황제가 생각해보니 구슬을 잃었던 날은 사미가 구슬을 얻은 날과 같았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그를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이 사미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가 없었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마을의 곡사(鵠寺)[지금의 숭복사(崇福寺)]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조부 훈입(訓入) 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고 하고, 증조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고 하고, 고조 법선(法宣) 대아간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고 하였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