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목왕후

문목왕후

분류 문학 > 인물 > 왕비

기본정보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왕비
생몰년: 미상

일반정보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비로 김충공(金忠恭)의 딸이다. 혈연상 문목왕후와 희강왕은 재종형제(再從兄弟)이다. 이렇게 문목왕후와 희강왕이 근친혼을 한 것은 왕위를 독점하고 있던 인겸태자계가 방계인 예영계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문정보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비로『삼국유사』에는 충효각간(忠孝角干) 또는 중공각간(重恭角干)의 딸로 기록되어 있으며,『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희강왕 원년조(836)에는 갈문왕(葛文王) 충공(忠恭)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두 기록 모두 희강왕의 장인에 관한 기록임으로 중공(重恭), 충공(忠恭)은 모두 동일인물로 생각된다.

문목왕후의 가계는 원성왕-인겸태자-김충공-문목왕후로 이어지며 희강왕의 가계는 원성왕-예영-헌정-제륭(희강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면, 희강왕과 문목왕후는 육촌간이면서 근친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제42대 흥덕왕의 동생인 김충공은 흥덕왕대 상대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후사가 없었던 흥덕왕은 차기 왕위를 동생 김충공에게 물려줌으로서 인겸태자계가 지속적으로 왕위를 계승해 나갈 것을 희망하였다. 제39대 소성왕, 제41대 헌덕왕, 제42대 흥덕왕과 김충공은 모두 인겸태자의 아들로 형제였기 때문에 혈연적 배경이나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 충공은 충분히 다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 김충공의 딸인 문목왕후가 근친인 예영계인 제륭과 혼인한 것은 원성왕계 내부의 단합을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김충공의 또다른 딸인 조명부인(照明夫人)도 예영의 아들이자 제륭(悌隆)의 숙부인 김균정(金均貞)의 후처가 되어 의정(誼靖 후에 제47대 헌안왕)을 낳기도 하였다. 이러한 근친혼은 신라 하대에 들어오면서, 특히 원성왕계 내부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근친왕족들이 국가의 요직을 독점하고 왕실가족의 분열을 막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 원성왕계는 김주원(金周元)계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했던 만큼, 내부적인 단합을 우선시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실제로 김주원에 의해 왕실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원성왕계 내부에서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인겸태자계는 예영계와의 단합을 혼인을 통해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문목왕후라 할 수 있다. 희강왕과 문목왕후의 혼인은 결국 예영계와 인겸태자계의 결합으로 볼 수 있다.(이기동, 1980)

참고문헌

이기동, 1980,「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 』85.
이기동, 1997,『한국사11-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원문 및 해석

第四十三 僖康王 [金氏 名愷隆 一作悌? 父憲眞角干 諡興聖大王 一作(翌)成 禮英?干子也 母美道夫人 一作深乃夫人 一云巴利夫人 諡順成太后 忠衍大阿干之女也 妃文穆王后 忠孝角干之女 一云重恭角干 丙辰年立 理二年]
제43 희강왕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개륭, 혹은 제옹이다. 아버지는 헌진각간이고 시호는 흥성대왕 혹은 익성이라고 하며 예영잡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도부인 혹은 심내부인 또은 파리부인이라고 하며 시호는 순성태후로 충연대아간의 딸이다. 비는 문목왕후로 충효각간의 딸이며 혹은 중공각간이라고도 한다. 병진년에 즉위하여 2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