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홍

위홍

분류 문학 > 인물 >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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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신라의 정치가.

생몰년 : ?-888.

일반정보

신라의 정치가로서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동생이며 신라 제51대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의 남편이다. 진성여왕의 총애에 힘입어 권세를 휘둘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권2 기이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에서는 위홍이 진성여왕의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의 남편이며 잡간(?干)의 벼슬에 있으면서 권세를 휘두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왕력에는 위홍이 진성여왕의 배필로서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2년(888)조에는 위홍이 평소 왕과 정을 통해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으며,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를 모아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죽은 뒤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되었다고 하였다. 신라 경문왕 12년(872)에 만들어진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 따르면 위홍은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친동생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위홍은 경문왕의 아들딸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에게는 숙부가 된다.

경문왕대를 관제의 개혁을 통한 국왕의 권력집중이 끊임없이 시도된 시기로 보는 관점에서 이러한 작업을 보필한 중심인물을 위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이 시기 정치개혁의 초점을 근시(近侍)기구, 문한(文翰)기구의 확장과 대두로 집약시키면서 양자가 일체화되어 국왕의 내조(內朝)를 형성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측근정치의 지향은 진골귀족의 합의제를 기본원리로 하는 골품제적인 정치운영 방식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경문왕의 뒤를 이은 헌강왕은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데 이는 경문왕대부터 특히 중요성을 띠기 시작한 문한기구 등의 영향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구를 이끌어 온 인물이 위홍이었던 만큼 헌강왕은 즉위와 동시에 위홍의 보좌를 받게 되었고, 그러한 경향은 진성여왕대 초까지 이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이기동, 1984)

경문왕의 아우였던 위홍이 정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고찰하여 이를 당시 정치상황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즉 위홍은 정강왕 때 왕위계승서열에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으나, 부모-자식으로 이어지는 경문왕의 직계비속(直系卑屬)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문왕 직계의 왕위계승을 고수하려는 정강왕의 뜻을 받들어 정강왕의 측근이었던 준흥(俊興)과 예겸(乂謙, 銳謙), 효종(孝宗) 등의 세력이 결탁하여 정강왕의 동생인 진성여왕을 즉위시켰다고 하였다. 즉 헌강왕의 아들인 요(嶢, 효공왕)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연령이 될 때까지의 과도기적인 의미에서 임시방편으로 진성여왕을 옹립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위홍과 진성여왕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먼저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전까지는 여왕과 정식 혼인관계가 아니었다가 여왕이 즉위한 후 일찍이 정강왕 때에 누렸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여왕에게 접근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위홍은 진성여왕의 남편이 되었으며 사후 여왕으로부터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보았다.(이배용, 1985)

경문왕가에서 왕위를 독점하는 동안 황룡사의 위치가 신라 상대(上代) 이래로 다시 재부각되었는데 이는 국가의식을 고조시키고 경문왕가 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여기에는 위홍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도 한다. 경문왕 12년(872)에 만들어진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서는 당시 이루어진 황룡사목탑 중건사업에서 위홍이 총책임을 맡은 것으로 되어 있다. 황룡사가 신라 상대의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감안하면, 위홍은 당시 경문왕의 정치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 이 시기에는 문한(文翰), 측근기구가 강화되어 내조(內朝)를 형성하며 측근정치를 지향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이 경문왕가의 상대복고적(上代復古的) 정신기반과 관련되는 주요 사건마다 위홍이 관련되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위홍의 성향은 고유신앙과 관련되는 왕실의 종교적 권위의 지향이었다고 파악하였다. 이후 위홍이 사망하자 왕실은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반발세력을 자극하여 왕경 내외의 혼란을 가속화시켰다고 하였다. 동시에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기이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에 있는 위홍이 진성여왕의 유모인 부호부인의 남편이라는 기록과,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2년(888)조에 “위홍이 평소에 왕과 통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전에 들어와 국사를 보았다”는 기록을 토대로 위홍이 진성여왕 즉위 전부터 여왕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즉위 후부터는 공공연한 관계로 드러나고 있지만 정식 혼인관계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전기웅, 1996) 그에 반하여 『삼국유사』권2 기이2 진성여대왕 거타지조와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2년(888)조의 기록과 『매계집(梅溪集)』 권4 서해인사전권후(書海印寺田券後)에서 강화부인(康和夫人)을 위홍의 처라고 한 것을 근거로 위홍이 본래 진성여왕의 정식남편이 아니고 사통하는 정부였다가 여왕 즉위 뒤에 남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김창겸, 2003)

헌강왕의 재위시 상대등으로 있던 위홍이 당대를 태평성세로 자찬할 만큼 훌륭하게 국정을 이끈 것으로 파악하고, 진성여왕대에 들어서면 위홍은 신라하대 상대등을 왕위에 오를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왕위를 계승할 제1후보자로 간주되고 있었다는 견해나 능히 실력으로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주장과 달리, 진성여왕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고 즉위 초의 정국을 주도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신라하대 왕실 가족에 의한 정치권력의 독점과, 진성여왕대에 이르면 헌강왕의 서자이자 진성여왕의 조카인 김요에게 선양을 해야 할 만큼 경문왕 직계자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정치적으로나 혈연적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은 위홍이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위홍의 정치적 업적과 왕실 내의 지위를 당시 정치 사회상과 관련하여 파악해야 하며, 이를 남녀간의 추문으로 해석하거나, 더 나아가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까지 연결하는 것은 재고가 필요하다고 하였다.(권영오, 2004)

비슷한 관점에서 경문왕부터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 경문왕가(家)가 왕위독점을 하는 데 있어서 위홍의 역할에 주목하기도 한다.「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등 금석문에서는 상재상(上宰相), 『삼국사기』에서는 상대등으로 지칭한 것에 주목하여 위홍이 권력의 핵심에 있었으며 경문왕의 동생으로서 국왕의 개혁을 측근에서 주도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위홍이 주도한 정치개혁은 왕실의 전제권을 한층 높였지만 한편으로는 견제세력을 무력화시킨 가운데서 이루어진 경문왕가의 왕위독점으로 인해 진골층의 균열이 심화되었다고 하였다.(황선영, 2006)

경문왕대 정국을 주도했던 위홍이 헌강왕 즉위 이후 어느 시기에 정치적 관여를 하지 못하다가 진성여왕 즉위 직후 다시 정치적으로 재기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경문왕은 임종 무렵 강력한 정치력을 지니고 있던 동생 위홍이 아들인 헌강왕에게 해를 끼칠 것을 우려하였다. 따라서 위홍과 진골귀족들로 하여금 헌강왕 보필에 대한 합의를 얻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당시 조야에 명망이 있던 낭혜화상(朗慧和尙)을 보증인으로 세웠다고 하였다. 위홍은 헌강왕 초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였으나 헌강왕 4년(879) 왕이 친정을 시도하였고 헌강왕의 왕비인 의명부인 김씨와 관련된 외척세력이 이를 뒷받침하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이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강왕대에 이루어진 헌강왕 추복행사에 위홍이 참석하지 못한 것이나 정강왕이 임종 전에 유력한 왕위후보자인 위홍 대신 여동생인 만(曼-진성여왕)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위홍은 자신을 견제하는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단념하는 대신 조카인 만을 왕으로 세우는 데 동의하고, 이를 계기로 정치적 침체기를 벗어나 재기에 성공했다고 보았다.(송은일, 2005)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에서 발견된 중화(中和) 3년(883)명 묵서명을 두고 묵서명과 불상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하여 묵서명에 있는 대각간(大角干)이 위홍일 가능성을 제기한 견해가 있다.(김창겸, 2005) 그러나 비로자나불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이 14세기의 것인 점, 888년 위홍이 사망했을 당시 각간이었던 점을 들어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김상현, 2006)

참고문헌

이기동, 1984,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일조각.
이배용, 1985, 「新羅下代 王位繼承과 眞聖女王」『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전기웅, 1996, 『羅末麗初의 政治社會와 文人知識層』, 혜안.
김창겸, 2003, 『新羅 下代 王位繼承 硏究』, 경인문화사.
권영오, 2004, 「김위홍과 진성왕대 초기 정국 운영」『大丘史學』76.
김창겸, 2005, 「합천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의 ‘大角干’銘 墨書」『新羅史學報』4.
송은일, 2005, 「신라하대 憲康王의 친정체제 구축과 魏弘」『新羅史學報』5.
김상현, 2006, 「九世紀 후반의 海印寺와 新羅 王室의 후원」『新羅文化』28.
황선영, 2006, 「新羅下代 景文王家의 王位繼承과 政治的 推移」『新羅文化』27.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진성여대왕 거타지)
眞聖女大王 居?知
第五十一眞聖女王 臨朝有年 乳母鳧好夫人與其夫魏弘?干等三四寵臣 擅權撓政 盜賊蜂起 國人患之 乃作?羅尼隱語書投路上 王與權臣等得之謂曰 此非王居仁 誰作此文 乃囚居仁於獄 居仁作詩訴于天 天乃震其獄 <因>以免之 詩曰 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 ?羅尼曰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說者云 刹尼那帝者 言女<主>也 判尼判尼蘇判尼者 言二蘇判也 蘇判爵名 干干三阿<干>(者 言三四寵臣)也 鳧伊者言鳧好也 此王代阿<飡>良<貝>王之季子也 奉使於唐 聞百濟海賊梗於津<島> 選弓士五十人隨之 舡次鵠島[鄕云骨大島] 風濤大作 信宿<浹>旬 公患之 使人卜之 曰 島有神池 祭之可矣 於是 具奠於池上 池水湧高丈餘 夜夢有老人 謂公曰 善射一人 留此島中 可得便風 公覺而以事諮於左右曰 留誰可矣 衆人曰 宜以木簡五十片 書我輩名 沈水而?之 公從之 軍士有居?知者 名沈水中 乃留其人 便風忽起 舡進無滯 居?愁立島嶼 忽有老人從池而出 謂曰 我是西海若 每一沙彌 日出之時 從天而降 誦?羅尼 三繞此池 我之夫婦子孫 皆浮水上 沙彌取吾子孫肝腸 食之盡矣 唯存吾夫婦與一女爾 來朝又必來 請君射之 居?曰 弓矢之事 吾所長也 聞命矣 老人謝之而沒 居?隱伏而待 明日扶桑旣暾 沙彌果來 誦呪如前 欲取老龍肝 時居?射之中 沙彌卽變老狐 墜地而斃 於是老人出而謝曰 受公之賜 全我性命 請以女子妻之 居?曰 見賜不遺 固所願也 老人以其女變作一枝花 納之懷中 仍命二龍 捧居??及使舡 仍護其舡入於唐境 唐人見新羅舡有二龍負之 具事上聞 帝曰 新羅之使 必非常人 賜宴坐於群臣之上 厚以金帛遺之 旣還國 居?出花枝 變女同居焉
진성여대왕 거타지
제51대 진성여왕이 나라 정사에 임한 지 몇 해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 등 서너 명의 총신이 권세를 잡고 정사를 휘두르니,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나라 사람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의 은어를 지어 써서 길바닥에 던져 두었다. 왕과 권신들이 이를 얻어 보고 말하기를, “왕거인이 아니고야 누가 이 글을 지었겠는가?”라고 하고, 곧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시에 이르길, “(연나라태자)단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고 (제나라사람)추연의 품은 원한 여름에 서리 내렸네. 지금의 내 신세 예전과 같건만 황천은 어찌하여 아무 조짐을 내리지 않는가.” 다라니에는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우우삼아간 부이사파하”라고 하였다. 풀이하는 이가 말하기를,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하고, 판니판니소판니는 소판 두 사람을 말한다.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사람의 총신을 말하고) 부이는 부호를 말한다.”고 하였다. 이 왕의 시대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백제의 해적이 진도에서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 50인을 뽑아 데리고 갔다. 배가 곡도[우리말로 곡대도라고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열흘 남짓 묵게 되었다. 공이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니, 말하기를, “섬에 신령한 못이 있으니 그곳에 제사지내야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못 위에 제사를 지냈더니, 못물이 한 길 남짓 솟아올랐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공에게 말하기를,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머물게 하면 순풍을 얻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공이 꿈에서 깨어나 좌우에게 이 일을 묻기를, “누구를 머물게 하면 좋을까?”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나무조각 50쪽에 우리 이름들을 써서 물에 띄워 가라앉는 것으로 제비를 뽑읍시다.”고 하였다. 공이 이에 따랐다. 군사 중에 거타지란 이가 있어 그의 이름이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머물게 하니, 순풍이 갑자기 일어나 배는 지체없이 나아갔다. 거타지가 수심에 쌓여 섬에 서있었더니, 갑자기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하기를, “나는 서해약(西海若)인데, 매번 한 승려가 해 돋을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떠오릅니다. 승려는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다 취해 먹고, 우리 부부와 딸 하나가 남았을 뿐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반드시 올 것이니, 청컨대 그대는 이를 쏘아 주시오.”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이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노인이 감사하고 물 속으로 돌아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승려가 과연 와서 전과 같이 주문을 외워 늙은 용의 간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 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추니 승려는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 때 노인이 나타나 감사하며 말하기를, “공의 덕택으로 우리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진실로 원하던 바입니다.”고 하였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바꿔 그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또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받들고 사신이 탄 배를 따라가 그 배를 호위하게 하여 당나라 경계에 들어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두 용이 신라의 배를 지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고 하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에 돌아와서 거타가 꽃가지를 꺼내니, 꽃이 여자로 변하였으므로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