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열한

분류 문학 > 인물 > 왕족
열한 본문 이미지 1

기본정보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의 6대조.
생몰년: 미상.

일반정보

『삼국유사』 기이 김알지 탈해왕대조에 따르면 열한은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의 6대조로써 알지의 아들이고, 아도의 아버지이다. 『삼국사기』에는 세한, 금석문에는 성한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 탈해왕대(金閼智 脫解王代)조에 따르면,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았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았고, 욱부는 구도(俱道)를 낳았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여 미추왕의 계보 및 신라 김씨의 시조에 대해 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미추이사금조에는 “왕의 선조 알지는 계림에서 나왔는데, 탈해왕이 거두어 궁중에서 길러,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았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았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았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았고,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는 곧 미추(味鄒)의 아버지다.(其先閼智出於鷄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卽味鄒之考也)”라 하여 『삼국유사』와 유사한 신라 김씨의 계보를 보여준다. 이에 따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비교하여, 『삼국유사』에서의 열한과 『삼국사기』에서의 세한은 같은 인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열한 즉 세한은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의 6대조로써 알지의 아들이고 아도의 아버지이다.

한편 금석문에서는 열한·세한이 보이지 않고 성한만 보이는데, “星漢”·“聖韓” 등으로 나타난다. 또 성한은 알지를 대신해 신라 김씨의 시조로 나와, 문헌자료에서 열한·세한이 알지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점과 차이점을 보인다. 이를테면, 「신라문무대왕릉비(新羅文武大王陵碑)」에는 “(문무왕의) 15대 조상인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령이 선악에서 나와, □□를 개창하여 옥란을 대하니…(十五代祖 星漢王 降質圓穹 誕靈仙岳 肇臨□□ 以對玉欄…)”라 하여 “성한”이 김씨의 시조로 나오고 있다. 또한 「흥덕왕릉비편(興德王陵碑片)」에도 “태조성한(太祖星漢)”이라는 문구가 보여 “성한”을 김씨의 시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에는 “대사의 법명은 이엄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계림인이다. 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니 실로 성한(星漢)의 묘예이다.(大師法諱利巖 俗姓金氏 其先?林人也 考其國史 實星漢之苗)”라 하였고,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에는 “□운은 속성이 김씨이니, 계림인이다. 그 선조는 성한(聖韓)으로부터 내려와 나물에서 크게 일어났다.(□運 俗姓金氏 鷄林人也 其先降自聖韓 興於那勿)”라 하였다.

『삼국유사』의 열한, 『삼국사기』의 세한, 금석문 상의 성한의 관계에 대해 “열한=세한=성한”이라는 견해와, “열한=세한≠성한”의 견해가 있다. 열한·세한·성한을 모두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는 열한의 “열(熱)”과 성한의 “성(星)”의 뜻은 모두다 불(火)·빛(光)을 의미하여 음운상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문무대왕릉비」의 대수계산도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내물왕의 아버지를 구도갈문왕이라 하였는데,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구도의 아들로 나오는 미추왕을 대수계산에서 제외하고, 직계조의 인식방법으로 대수계산을 하면 문무왕의 15대조는 열한(세한)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한·세한·성한은 모두 같은 인물이라고 본다.(前間恭作, 1925; 강종훈, 1994)

이와는 반대로 열한과 세한은 동일시 하지만 성한은 동일인물로 보지 않는 견해가 있다. 문헌상에는 김씨의 시조가 알지인데, 금석문상에는 그 시조가 성한으로 기록되어 있어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성한은 알지(今西龍, 1933), 미추 등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성한을 미추로 파악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제13대 미추왕과 제17대 내물왕 사이에 3·4대가 빠졌고, 제30대 문무왕의 10대조(祖)인 내물왕과 「신라문무대왕릉비」에 문무왕의 15대조(祖)로 기록되어 있는 성한 사이에 혈연관계상 4대가 들어있었다고 본다면, 미추왕과 성한은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이다.(이종욱, 1980) 이 견해는 오묘제가 완성된 혜공왕대까지는 왕위에 올랐던 사람만 헤아린 방식이 적용되고, 선덕왕대 이후에는 직계조에 대한 조상인식방법이 새로이 적용된다는 세대수 계산방식으로도 뒷받침된다. 이러한 세대수 계산방식에 따르면 「신라문무대왕릉비」에 기록된 문무왕의 15대조는 미추왕이 되고, 「흥덕왕릉비편」“입사대계(卄四代孫)”라고 하여 흥덕왕의 24대조라고 기록된 “태조성한”도 미추왕이 된다. 따라서 성한과 미추는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이다.(김창호, 1983)

참고문헌

前間恭作, 1925, 「新羅王の世次と其名につきて」『東洋學報』 15-2.
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이종욱, 1980,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김창호, 1983, 「新羅 太祖星漢의 재검토」『歷史敎育論集』 5.
강종훈, 1994, 「神宮의 設置를 통해 본 麻立干時期의 新羅」『韓國古代史論叢』 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알지 탈해왕대)
金閼智 脫解王代
永平三年庚申[一云 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 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掛於樹枝 光自?出 亦有白?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 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 不卽王位 因金?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 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영평(永平) 3년 경신(60)[또는 중원(中元) 6년이라고 하는데 잘못이다. 중원은 모두 두 해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을 가고 있는데, 시림 속에서[또는 구림이라고 한다.] 커다란 광명을 보았다. 보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워졌으며, 구름 속에는 금궤짝이 있어 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빛은 궤짝에서부터 나왔으며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상황을 왕에게 알리니 (왕은) 그 숲에 행차하였다. 궤짝을 열자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 있다가 곧 일어서니 혁거세의 옛 일과 같았으므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란 곧 우리말로 어린 아이의 호칭이다. 품에 안고 수레에 태워 궁궐로 돌아가는데, 새와 짐승들이 함께 따라와 기뻐서 날뛰며 춤을 추었다. 왕은 좋은 날을 골라서 태자로 삼게 하였는데, 후에 파사에게 양보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내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를 낳았고, 아도는 수류를 낳았고, 수류는 욱부를 낳았고, 욱부는 구도[또는 구도라고 한다]를 낳았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올랐으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