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황후

문자황후

분류 문학 > 인물 > 왕비

기본정보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왕비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왕비이며 헌안왕의 큰 딸이다.

전문정보

문자황후는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왕비이며 제47대 헌안왕의 큰 딸이다. 『삼국사기』에는 영화부인(寧花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문왕과 문자황후의 혼인에 대해서는 『삼국유사』권2 기이2 48경문대왕(四十八景文大王) 조와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헌안왕 4년 기사에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헌안왕 4년(860) 9월에 왕은 당시 15세인 응렴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유학(遊學) 중에 선인(善人)을 본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귀인으로서 겸손한 자, 부자로서 검소한 자, 세력가로서 남을 누르지 않는 자를 선행자로 들어 응답하였다. 이에 왕은 감복하고 응렴을 사위로 삼고자 하여 장녀와 차녀의 두 딸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니 그는 부모에게 상의한 후 미색이 뛰어난 차녀를 얻고자 하였으나 흥륜사 스님이며 화랑이었던 범교사(範敎師)의 충고를 받아 3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장녀와 혼인하였다. 그 다음 해에 왕위에 오른 응렴은 뒷날 범교사를 불러 그 3가지 이익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첫째, 왕의 뜻에 맞았으므로 총애가 깊어진 것, 둘째 이로 인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것, 셋째 바라던 둘째 딸도 취하게 된 것이 그것이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경문왕에게는 왕비가 2명이 있었다. 경문왕 설화에서 전해오듯이 모두 헌안왕의 딸로서 첫째 왕비는 문자황후로 큰 딸이며 차비(次妃)는 경문왕 3년(863)에 혼인한 헌안왕의 작은 딸이다.(김창겸, 2003)

문자황후와 경문왕의 자식으로는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제50대 정강왕(定康王), 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있다.

한편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어머니는 문자황후로 혹은 의명왕후라고 한다.(母文資皇后 一云義明王后)”라고 하여 문자황후의 이칭을 의명왕후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즉위조에 서술되어 있는 “왕비는 의명부인이다.(妃懿明夫人)”라는 기록이 누락되어 잘 못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문자황후와 의명왕후는 동일인물이 아니다.

참고문헌

김창겸, 2003, 『新羅下代 王位繼承 硏究』, 경인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四十八 景文王 [金氏 名膺廉 父啓明角干 追封義[一作懿]恭大王 卽僖康王之子也 母神<武>王之女光和夫人 妃文資(皇)后 憲安王之女 辛巳立 理十四年]
제48 경문왕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응렴이다. 아버지는 계명각간으로 추봉된 의(義)[또는 의(懿)]공대왕이니 즉 희강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무왕의 딸 광화부인이다. 왕비는 문자황후로 헌안왕의 딸이다. 신사(861)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

第四十九 憲康王 [金氏 名晸 父景文王 母文資皇后 一云義明王后 乙未立 理十一年]
제49대 헌강왕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정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며 어머니는 문자황후이다. 혹은 의명왕후라고 한다. 을미(875)에 즉위하여 11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