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육왕

아육왕

분류 문학 > 인물 > 왕

기본정보

고대 인도의 왕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아육왕은 고대 인도의 아소카 왕을 가리킨다. 그는 전 인도를 통일했으며, 불교를 숭상하며 많은 탑과 사원을 세웠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조에서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을 인용하여 고구려(高麗) 요동성(遼東城) 곁에 탑이 있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기서 그 탑이 아육왕(阿育王)과 관련된 육왕탑(育王塔)이라고 불리며, 아육왕(育王)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이 세워졌다는 내용을 언급하였다. 또한 고전(古傳)을 인용하여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령하여 9억명의 사람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내에 8만 4천개의 탑이 세워졌다는 내용도 전한다.

아육왕은 아소카(Asoka, 재위 기원전 270-230년)왕의 음사인데, 무우(無憂)라고도 번역된다. 찬드라굽타(Candragupta, 재위 기원전 320-293년)가 마가다국의 난다왕조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마우리아(Maurya) 왕조의 제 3대왕으로 인도의 남부지역을 제외하고 전 인도를 통일하였다. 아육왕이 인도 동부지역의 칼링가(Kalinga)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살육의 참상을 보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무력적인 정복을 포기하고 비폭력과 정의에 기초한 다르마(Dharma)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숭상하면서 많은 탑과 사원을 세우고 불교를 전파하였다.(조길태, 1994)

특히 아육왕이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는 내용은 서진(西晉)의 안법흠(安法欽)이 306년에 번역한 『아육왕전(阿育王傳)』 권1 본시토록(本施土錄)과 양(梁)의 승가바라(僧伽婆羅)가 512년에 번역한 『아육왕경(阿育王經)』 권1 생인록(生因錄)에서 확인된다. 여기서는 아육왕이 상좌(上佐) 야사(夜舍)앞에 나가서 합장하며 염부제 안에 8만 4천 보탑을 만들어 세우고자 한다고 하니, 상좌가 왕이 단번에 탑을 만들고 싶다면 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손으로 해를 막아서 나라의 경계를 비추니 일시에 탑이 모두 세워졌는데, 탑이 완성되자 모든 사람들이 아육왕을 정법아노가왕(正法阿怒伽王)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조에서 아육왕탑이 세워진 곳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 고구려에 불교의 연원이 오래된 것으로 강조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또한 아육왕탑이 발견되는 과정에 한 승려의 모습이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나타나는 신이한 정황이 묘사되었는데 이것은 아육왕탑의 출현 상황에 신비함을 주기 위한 것으로, 이러한 방식은 『삼국유사』에서도 인용된 당(唐)의 도선(道宣)이 편찬한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에 있는 각종 불탑이나 불상 관련 설화에서 많이 확인된다. 아육왕탑이 중국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설화는 동진(東晉) 이후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요동성육왕탑과 관련된 설은 동진 시기 이후에 수용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신동하, 2000)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육왕과 관련된 내용이 한 건 더 확인된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조에서 아육왕이 보낸 불상과 모본과 금이 경주의 동쪽 해안인 울산 부근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도 결국은 중국을 통하여 수용된 연기설의 연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육왕이 사망한 수 백년이 지난 뒤 인도의 불상이 신라에 도착하였다고 함으로서, 인도에서 크게 불사를 일으킨 아육왕의 후광을 받아서 신라의 불교도 발전하게 된다고 믿는 신라인의 사상적 일면을 반영한 것이다.(김리나, 1979)

또한 앞서 살펴본 요동성이 고구려의 대중국 출입구인 것처럼 신라의 경우도 외래문화와 접촉이 용이한 울산 지역을 통해서 아육왕과 관련된 연기설화가 전해진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신동하, 2000)

참고문헌

김리나, 1979, 「皇龍寺의 丈六尊像과 新羅의 阿育王像系佛像」『震檀學報』46·47合.
조길태, 1994, 『인도사』, 민음사.
신동하, 2000, 『新羅 佛國土思想의 展開樣相과 歷史的 意義』,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요동성육왕탑)
遼東城育王塔
三寶感通錄載 高麗遼東城傍塔者 古老傳云 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 至此城 見五色雲覆地 往尋雲中 有僧執錫而立 旣至便滅 遠看還現 傍有土塔三重 上如覆釜 不知是何 更往覓僧 唯有荒草 掘尋一丈 得杖幷履 又掘得銘 上有梵書 侍臣識之 云是佛塔 王委曲問詰 答曰 漢國有之 彼名蒲圖王[本作休屠王 祭天金人] 因生信 起木塔七重 後佛法始至 具知始末 今更損高 本塔朽壞 育王所統一閻浮提洲 處處立塔 不足可怪 又唐龍朔中 有事遼<左>行軍薛仁貴 行至隋主討遼古地 乃見山像 空曠蕭條 絶於行往 問古老云 是先代所現 便圖寫來京師[具在<右>函] 按西漢與三國地理志 遼東城在鴨綠之外屬漢幽州 高麗聖王 未知何君 或云東明聖帝 疑非也 東明以前漢元帝建昭二年卽位 成帝鴻嘉壬寅升遐 于時漢亦未見<貝>葉 何得海外陪臣 已能識梵書乎 然稱佛爲蒲圖王 似在西漢之時 西域文字或有識之者 故云梵書爾 按古傳 育王命鬼徒 每於九億人居地 立一塔 如是起八萬四千於閻浮界內 藏於巨石中 今處處有現瑞非一 蓋眞身舍利 感應難思矣 讚曰 育王寶塔遍塵? 雨濕雲埋蘚?<斑>想像當年行路眼 幾人指點祭神?

요동성의 육왕탑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고려(高麗,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곁의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옛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는 것을 보고 가서 구름 속을 찾아보니 한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문득 사라지고 멀리서보면 다시 나타났다. (스님의) 곁에는 3층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상단은 솥을 덮은 것 같았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스님을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 장(丈)정도 파서 찾아보니 지팡이와 신발을 얻을 수 있었고, 또 파서 명문(銘文)을 얻었는데, 명문 위에는 범서(梵書)가 있었다. 시종하는 신하가 알아보고 이것이 불탑이라고 말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어보니 답해서 말하기를, (이것은) 한국(漢國)에 있었는데,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본래는 휴도왕(休屠王)이라고 했는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이다]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왕은) 이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서 7층 목탑을 세웠는데 후에 불법이 비로소 전해지자 그 시말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탑의) 높이가 줄어서 본래 탑이 썩어서 무너졌다. 육왕(育王, 아육왕, 재위 기원전 268-232)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에는 곳곳에 탑이 세워졌으니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당(唐) 용삭(龍朔) 연간(661-663) 중에 요동의 좌측에 전쟁이 있을 때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가 수(隋)의 황제가 토벌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렀다. (그가) 이내 산의 모습이 텅 비어 매우 쓸쓸하여 사람의 왕래가 끊어진 것을 보고 늙은이에게 물었다. 늙은이가 답하기를 이는 옛날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므로 (그것을) 그려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우자함(右函)에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鴨綠)의 밖에 있어 한(漢)의 유주(幽州)에 속하는데, 고구려의 성왕(聖王)은 어떤 임금인지 알 수 없다. 혹 동명성제(東明聖帝, 동명성왕, 재위 기원전 37-19)라고도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동명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9-33)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재위 기원전 33-7) 홍가(鴻嘉) 임인(기원전 19)에 승하하였으며, 그때 한(漢)은 패엽(貝葉)을 보지 못했는데 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이 벌써 범서(梵書)를 알 수 있겠느냐.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蒲圖王)이라고 칭했으니, 서한(西漢)때 서역문자를 아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범서하고 말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샆펴 보건데, 아육왕의 귀신의 무리에게 명령하여 9억명의 사람이 사는 곳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했는데, 이렇게 해서 염부계(閻浮界) 내에 8만 4천개를 세워서 큰 돌 속에 소장했다. 지금 곳곳에 상서러운 것이 보이는 것이 하나가 아니니 대개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찬한다. “아육왕의 보탑은 속세 곳곳에 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서 이끼마저 아롱졌네. 그때 길손들의 안목을 상상하면 몇 사람이나 탑에 제사를 지냈을까.”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
皇龍寺丈六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黃龍寺 至己丑年 周圍牆宇 至十七年方畢 未幾海南有一巨舫 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 ?看有牒文云 西竺阿育王 聚黃鐵五萬七千斤 黃金三萬分[別傳云 鐵四十萬七千斤金一千兩 恐誤 或云 三萬七千斤] 將鑄釋迦三尊像 未就 載舡泛海而祝曰 願到有緣國土 成丈六尊容 幷載<模>樣一佛二菩薩像 縣吏具狀上聞 勅使卜其縣之城東爽塏之地 創東竺寺 邀安其三尊 輸其金鐵於京師 以大建六年甲午三月[寺中記云 癸巳十月十七日] 鑄成丈六尊像 一鼓而就 重三萬五千七斤 入黃金一萬一百九十八分 二菩薩入鐵一萬二千斤 黃金一萬一百三十六分 安於皇龍寺 明年像淚流至踵 沃地一尺 大王升遐之兆 或云 像成在眞平之世者 謬也 別本云 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生佛後一百年間 恨不得供養眞身 ?化金鐵若干斤 三度鑄成無功 時王之太子 獨不預斯事 王使詰之太子奏云 獨力非功 曾知不就 王然之 乃載舡泛海 南閻浮提十六大國 五百中國 十千小國 八萬聚落 靡不周旋 皆鑄不成 最後到新羅國 眞興王鑄之於文仍林 像成 相好畢備 阿育此飜無憂 後大德慈藏西學 到五臺山 感文殊現身授訣 仍囑云 汝國皇龍寺 乃釋迦與迦葉佛講演之地 宴坐石猶在 故天竺無憂王 聚黃鐵若干斤泛海 歷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 成安其寺 蓋威緣使然也[與別記所載符同]像成後 東竺寺三尊 亦移安寺中寺記云 眞平五年甲辰 金堂造成 善德王代 寺初主眞骨歡喜師 第二主慈藏國統 次國統惠訓 次廂律師云 今兵火已來 大像與二菩薩皆融沒 而小釋迦猶存焉 讚曰 塵方何處匪眞鄕 香火因緣最我邦 不是育王難下手 月城來訪舊行藏

황룡사장육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즉위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궁궐을 용궁(龍宮)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에 고쳐서 절로 삼고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 기축(己丑, 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장과 지붕을 만들어 17년에 와서야 비로소 끝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다.]에 와 닿았다. (이 배를) 뒤져보니 첩문(牒文)이 있어 이르기를,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 재위 기원전 268-232)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서[「별전(別傳)」에는 철 40만 7천근, 금 1천량이라고 했는데, 아마 잘못된 것 같다. 혹은 3만 7천근이라도 한다.]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주조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원컨대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丈六)의 존귀한 모습이 되어 주소서.’ 라고 하고 아울러 견본으로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둘을 실었다.” 고을 관리가 문서를 갖춰 국왕에게 아뢰었더니, 그 고을 성 동쪽의 탁트인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세워 세 불상을 안치하고, 그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하여 대건(大建, 569-581) 6년(574) 갑오(甲午) 3월에[절의 기록에는 계사(癸巳, 573) 10월 17일이라고 하였다.] 장육존상을 주존하였는데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 1만 1백 98푼이 들었으며, 두 보살에는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백 36푼이 들었다. 황룡사에 모셨더니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자나 젖었다. (그것은) 대왕(진흥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 완성되었다고 하나 잘못이다. 『별본(別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육왕(阿育王)은 서축(西竺) 대향화국(大香華國)에 살았다. 석가가 돌아가신 후 백년 무렵에 태어나 석가의 진신에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3번이나 불상을 주조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때 왕의 태자만이 그 일에 참례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그를 힐책하자 태자가 아뢰기를, ‘(그것은) 혼자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벌써 안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이에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남염부제(南閻浮提) 16대국(大國), 5백 중국(中國), 10천 소국(小國), 8만 취락(聚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으나 모두 주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최후로 신라국(新羅國)에 이르러 진흥왕(眞興王)이 문잉림(文仍林)에서 그것을 주조하여 불상을 완성하니 상호가 다 갖추어졌다. 아육(阿育)을 번역하면 무우(無憂)라고 한다. 후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서방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으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며 이에 부촉하기를,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불(釋迦佛)과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한 땅이므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천축(天竺)의 무우왕(無憂王, 아육왕)이 황철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 3백여 년이나 지난 후에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던 것이니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因緣)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별기(別記)의 기록과 부합된다.]라고 하였다. 불상이 이루어진 후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상도 (이) 절로 옮겨 안치하였다.” 절의 기록에는 진평왕(眞平王) 5년 갑진(甲辰, 584)에 금당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 절의 첫 주지는 진골 환희(歡喜) 스님이고, 제 2대 주지는 자장(慈藏) 국통(國統), 다음은 혜훈(惠訓) 국통(國統), 다음은 상률(廂律) 스님이라 하였다. 지금은 병화(兵火, 몽고의 침입) 이래로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이 남아 있다. 찬한다. “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