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암리 집자리

흔암리 집자리

[ 驪州 欣岩里 住居址 ]

지역 여주
여주 흔암리 집자리 출토유물

여주 흔암리 집자리 출토유물

여주 흔암리 12호 집자리

여주 흔암리 12호 집자리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흔암리에 위치한다. 1962년 김원룡 교수가 지표에서 채집한 석기, 토기류를 『고고미술』에 소개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고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고고학과가 1972~1978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하여 집자리〔住居址〕 16기가 확인되었다. 흔암리는 여주읍에서 남한강 상류를 따라 약 1㎞ 올라간 지점에 있으며 이곳에서 약 5㎞ 남쪽에는 경기·강원·충북을 가르는 경계선이 지나고 있고 이 지점을 향해 강이 굴곡되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넓은 충적사질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유적은 흔암리 마을의 표고 123m의 뒷산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사면 일대에 위치한다.

대부분의 집자리는 구릉의 경사면을 파서 생긴 평지를 바닥면으로 하고 이로 인하여 생긴 수직면을 벽면으로 이용하였다. 1호∼3호 집자리는 남북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4호∼16호는 동서방향으로 뻗은 능선 위에 자리잡고 있다. 평면 형태는 모두 장방형으로서 그 장축은 대체로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다. 크기는 1호가 820×420㎝이고 2호가 잔존 320×690㎝이다. 면적은 네 벽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 11.6∼42㎡로서 상당히 다양하다.

내부에서는 출입구시설(出入口施設), 기둥구멍〔柱穴〕, 저장구덩이〔貯藏孔〕, 화덕자리〔爐址〕, 선반시설 등이 확인된다. 화덕자리는 중앙에 만들어지는 예는 거의 없고 대부분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특별한 시설 없이 바닥을 파서 만든 구덩식〔竪穴式〕이며 그 평면형태는 타원형이 많다.

출토유물로는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골아가리무늬토기〔口脣刻目文土器〕,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二重口緣短斜線文土器〕 굽다리접시모양〔豆形〕의 붉은간토기편 등과 흙으로 만든 그물추〔土製 漁網錘〕가 있는데, 한반도의 동북 및 서북 지방의 토기 요소가 함께 발견되고 있다. 토기에 대한 과학적 분석 결과 붉은간토기는 민무늬토기에 비하여 점토 광물의 비율이 훨씬 높아 정선된 진흙을 사용하였고 비짐으로 장석보다 석영을 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석기는 통자루 및 홈자루간돌검〔一段, 二段柄式磨製石劍〕 12점, 피홈〔血溝〕있는 간돌검, 반달돌칼〔半月形石刀〕 17점, 공이〔敲石〕 10점, 돌도끼〔石斧〕 99점, 돌화살촉〔石鏃〕 142점, 돌보습〔石犁先〕 2점, 갈돌〔耉石棒〕 4점, 갈판〔耉石〕 4점, 바퀴날도끼〔環狀石斧〕, 가락바퀴〔紡錘車〕 11점 등이 있다. 또한 12호에서는 다량의 탄화미(炭化米)와 보리, 조, 수수 등의 곡물이 발견되었다. 탄화미는 단립형(短粒形)의 자포니카(Japonica)로 평양 호남리(남경) 및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 유적에서는 사냥과 채집, 어로 및 방직 활동과 함께 농경을 토대로 최소한의 자급자족적 생활을 영위하는 혼합경제형태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치는 모두 13개인데 이들을 나이테연대를 이용하여 연대를 보정하였다. 7호는 2520±220 B.P., 1810±190 B.P.로 나왔고 8호는 2696±160 B.P., 2666±160 B.P., 12호의 경우 3306±70 B.P.(보정연대 B.C. 1490∼1650), 3007±70 B.P.(보정연대 B.C. 1030∼1300), 3069±70 B.P.(보정연대 B.C. 1170∼1390)로 나왔다. 경기도 기념물. (박양진)

참고문헌

  • 흔암리 주거지 I, II, III, IV(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총간 제4, 5, 7, 8책, 1973년 ∼ 1977년)
  • 여주 흔암리 선사취락지(최몽룡·박양진, 정신문화연구 여름호,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