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은행

[ bank , 銀行 ]

요약 예금의 수입(受入), 유가증권 또는 기타 채무증서의 발행에 의하여 일반대중으로부터 널리 채무를 부담함으로써 획득한 자금을 규칙적·조직적으로 대출하는 업무를 영위하는 기업.
서울 한국은행 본관

서울 한국은행 본관

은행의 역사는 BC 17세기에 씌어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법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는 재산의 단순한 기탁 외에도 기탁된 재산의 운용이나 그에 따른 이자에 대한 규정도 명기되어 있다. 중세에 이르러 지중해 연안에서 상업교역의 길이 열렸으나, 당시는 잡다한 종류·품질의 화폐유통되어 상업적 교역이 원활히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이로 인해 환전상이 나타나 뱅크(bank)로 불리는 환전대 위에서 환전업을 영위하기 시작하면서 화폐수수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초기의 환전은행은 보관은행(保管銀行)이었으나, 이후 보관된 화폐를 단순한 대체방법을 이용해 상인들 간에 서로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길이 열리면서 다시 대체은행(對替銀行)으로 발전하였다. 대체은행의 출현은 화폐의 지급, 확실한 결제, 화폐유통의 원활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근세에 들어와 영국에서는 화폐제도가 개선됨에 따라 중세적인 대체은행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 무렵에는 상업거래의 발달과 더불어 자금수요가 증대되었고, 이에 대응하여 골드스미스(goldsmith)라고 하는 금장(金匠:처음에는 금세공사로 환전상을 겸하였으나 귀금속 보관업으로 전환하여 근대적 은행업의 효시가 됨)이 등장하였다. 17세기 무렵 런던의 상인들은 금화·귀금속의 보관을 금장에게 의뢰하고, 보관영수증으로 '골드스미스노트'를 받았다. 이 노트가 금화·귀금속을 대신하여 시중에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금장은 보관하고 있는 금화·귀금속의 가액을 초과하는 노트를 발행·대부함으로써 이자소득을 얻었다. 이와 같이 금장이 보관 중인 금화·귀금속의 가액 이상으로 노트를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였는데, 이를 '골드스미스 원리'라고 한다.

① 노트의 일부는 금화·귀금속에 의해 환급(還給) 청구를 받는 일이 거의 없다. ② 그 밖의 노트는 금화·귀금속에 의한 환급 청구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동시에 환급을 청구하는 일은 없다. ③ 한편에서 노트가 금화·귀금속으로 환급됨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노트의 발행과 상환(相換)으로 새로운 금화·귀금속이 보관된다. 이와 같은 골드스미스노트의 발행에 의한 대부는 마침내 은행의 은행권 발행에 의한 대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은행권 발행에 대해서는 그후 잉글랜드은행(영국 중앙은행)에 독점권이 주어짐으로써, 그 밖의 은행은 예금통화를 직접 만들어 내거나 예금을 받아들여 그 자금으로 대출을 행하는 대부은행 또는 예금은행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유럽 대륙에서 환전은행·대체은행이, 근세에 와서는 영국에서 예금은행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환전은행이나 대체은행도 예금은행의 일면을 지니고 있고, 예금은행도 환전은행이나 대체은행의 일면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은행의 호칭은 각기 그 특징에 따라 이름지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제사회에서의 은행은 예금은행의 명칭을 갖게 되었을 때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예금은행은 처음에는 단기예금과 단기대출을 주업무로 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장기예금과 장기대출도 취급하게 되었다.

한국에 근대적 은행제도가 도입된 것은 일본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개설된 1878년(고종 15)이다. 1909년 중앙은행으로서 구(舊)한국은행이 설립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업무를 조선은행에 이관, 8·15광복과 더불어 한국은행으로 복귀하였다. 상업은행은 1897년에 설립된 민족계(民族系)의 한성은행(漢城銀行)이 효시이고, 특수은행은 1918년에 발족한 조선식산은행(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이 효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