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전쟁

장미전쟁

다른 표기 언어 Wars of the Roses

요약 요크가와 랭커스터가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은 헨리 6세의 무능과 그에 대한 요크 공작 리처드의 반발로 일어났다. 요크가의 승리 후,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반란을 일으켜 1469년 내전이 다시 발생했다. 그들은 에드워드 4세를 폐위하고 헨리 6세를 복위했다. 네덜란드로 도망갔던 에드워드는 1471년 3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워릭 일당을 격파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고 그의 큰 아들인 에드워드 5세가 즉위했으나, 곧 숙부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 의해 폐위되었다. 글로스터 공작은 리처드 3세로 즉위했으나,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가 1485년 8월 보즈워스평원 전투에서 리처드를 죽임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왕위를 놓고 랭커스터 가문요크 가문이 싸운 전쟁으로, 여러 해가 지난 뒤 요크 가문의 하얀 장미와 랭커스터 가문의 빨간 장미 문장(紋章)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양쪽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주장했다. 1399년부터 랭커스터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5세기 중엽 거의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지 않았다면 요크 가문에서는 왕권에 대한 권리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1422년 헨리 5세가 죽은 뒤 오랫동안 헨리 6세의 파당적인 소수당이 집권했다. 사병(私兵)을 가진 실력자들은 시골지역을 지배했고 무법상태가 만연했으며 세금 부담은 힘겨웠다. 헨리는 무기력하고 모자라는 사람으로 나중에는 광기까지 보였으며 야심만만한 왕비 앙주의 마거릿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마거릿의 추종자들은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의 입지가 나빠지고 있음을 참견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헨리는 1453년 완전히 정신이상 중세를 보였고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귀족들의 동맹은 요크 공작 리처드를 섭정으로 세웠다. 1455년 건강을 회복한 헨리가 마거릿 일파의 권위를 재확립시키자, 요크는 자기방어를 위해 무기를 잡아야 했다.

세인트올번스에서의 첫전투(1455. 5. 22)는 요크 일가의 승리로 끝났고 4년 동안의 불안한 휴전을 가져왔다(세인트올번스 전투). 1459년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요크 가문은 블로어히스(9. 23)에서 싸워 이겼으나 소규모의 러드퍼드 다리(10. 12) 전투 이후 흩어지게 되었다(블로어히스 전투, 러드퍼드 다리 전투). 프랑스에서 워릭은 요크파 군대를 다시 모아 1460년 6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노샘프턴(7. 10)에서 랭커스터 군을 크게 물리쳤다(노샘프턴 전투). 요크는 왕위에 오르려 했으나 헨리가 죽은 뒤에 계승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고 타협했다.

이것은 사실상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의 계승권을 빼앗은 것으로, 마거릿 왕비는 계속해서 이에 반대했다.

잉글랜드 북부에서 병력을 모은 랭커스터 가문은 12월 웨이크필드에서 요크를 기습해 살해한 뒤 남쪽으로 런던을 향해 진군하던 도중 제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1461. 2. 17)에서 워릭을 물리쳤다(웨이크필드 전투). 한편 요크의 맏아들이며 후계자인 에드워드는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2. 2)에서 랭커스터군을 무찌르고 런던 탈환을 위해 진군하여 2월 26일 마거릿보다 앞서 도착했다.

젊은 요크 공작은 3월 4일 웨스트민스터에서 국왕 에드워드 4세로 선포되었다. 이어 에드워드는 남아 있던 워릭의 병력과 함께 마거릿을 타우턴까지 추격했다(타우턴 전투). 요크는 거기서 혈전을 벌인 끝에 완승을 거두었으며 헨리와 마거릿 및 그들의 아들은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이로써 전쟁의 제1국면은 랭커스터파가 아직도 저항하고 있는 소수 고립지역의 진압만 남겨두고 모두 끝났다.

다음 국면의 전쟁은 요크 가문 내의 분쟁에서 시작되었다. 워릭과 그 일파는 점점 에드워드 왕권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워릭은 외교문제에 있어 왕과 의견을 더욱 심각하게 달리했다. 1469년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워릭과 반항적인 에드워드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는 북부에서 반란을 선동했다.

그들은 7월 에지코트(밴베리 근처)에서 에드워드의 지지자들을 물리치고 에드워드를 포로로 삼았다(에지코트 전투). 1470년 3월경 에드워드는 다시 통치력을 회복했고 워릭과 클래런스는 프랑스로 도망갔다. 거기서 그들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 및 과거 그들의 적이었던 앙주의 마거릿과 손을 잡았다. 잉글랜드로 돌아온(1470. 9) 그들은 에드워드를 폐위하고 헨리 6세를 왕으로 복위했다.

에드워드는 추종자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도망갔다가 부르고뉴 사람들의 도움을 확보한 뒤 1471년 3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에드워드는 워릭을 물리친 뒤 클래런스의 충성을 다시 약속받고 4월 14일 바넛에서 워릭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바넛 전투). 바로 그날 마거릿은 웨이머스에 상륙했다.

바넛의 소식을 들은 그녀는 서쪽으로 진군해 웨일스의 안전지대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세번 강에 먼저 도착해 투크스베리(5. 4)에서 마거릿을 붙잡은 다음 그녀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녀 아들을 죽였다(투크스베리 전투). 그후 얼마 되지 않아 헨리 6세는 런던 탑에서 살해되었다. 에드워드는 왕위를 지키며 무사히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1483 죽음).

1483년 에드워드의 동생 리처드 3세는 조카인 어린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오름으로써 많은 요크 가문사람들을 따돌렸으며 이렇게 따돌림당한 사람들은 마지막 희망을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뒤의 헨리 7세)에게 걸었다.

프랑스와 요크파 망명자들의 도움으로 헨리는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평원 전투에서 리처드를 죽이고 전쟁을 끝냈다. 그는 1486년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 주장을 하나로 만들었다. 헨리는 1487년 6월 16일 왕위 요구자 램버트 심널을 지지하며 반란을 일으킨 요크파를 물리쳤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보통 전쟁이 끝난 시기로 삼는 1485년보다 바로 이 날을 전쟁이 끝난 날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