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릭

워릭

다른 표기 언어 Richard Neville, 1st Earl of Warwick
요약 테이블
출생 1428. 11. 22
사망 1471. 4. 14,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바넛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의 장미전쟁(1455~85) 전반기에는 왕권의 향방을 좌우했고, 16세기 이래 '킹 메이커'로 불렸다. 1461년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를 왕으로 세웠다가 나중에는 퇴위당해 있던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 솔즈베리 백작 1세 리처드 네빌의 아들인 그는 결혼을 통해 1449년 워릭 백작이 되었고 잉글랜드 전역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얻었다. 왕위를 향한 두 가문 사이에서 약한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실권을 휘둘렀다. 에드워드 4세가 왕이 된 후 실권을 장악하려는 에드워드와의 갈등 끝에 에드워드를 추방하고 헨리 6세를 복위시켰으나, 곧 에드워드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의 장미전쟁(1455~85) 전반기에는 왕권의 향방을 좌우했다. 16세기 이래 '킹 메이커'로 불렸다.

1461년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를 왕으로 세웠다가 나중에는 퇴위당해 있던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6세에게 권력(1470~71)을 돌려주었다. 솔즈베리 백작 1세(또는 5세, 1460 죽음) 리처드 네빌의 아들인 그는 결혼을 통해 1449년 워릭 백작이 되었고 잉글랜드 전역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얻었다. 1453년 워릭과 그의 아버지는 실권 없는 왕 헨리 6세의 총리이자 서머싯 공작인 랭커스터 가문의 에드먼드 보퍼트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는 요크 공작 리처드와 손을 잡았다. 두 진영은 결국 무력대결을 벌였고, 1455년 5월 하트퍼드셔의 세인트앨번스 전투에서 워릭은 측면 공격을 벌여 순식간에 요크 가문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이 공으로 워릭은 프랑스 연안에 있는 잉글랜드령 칼레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460년 칼레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온 워릭은 노샘프턴 전투에서 헨리 6세를 패배시키고 그를 포로로 잡았다(1460. 7. 10). 요크 가문과 의회는 헨리가 왕위에 머무르는 데 합의했는데, 이는 약한 왕을 선호했던 워릭의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곧 바뀌었다. 1460년 12월 워릭의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과 요크가 전사하고, 랭커스터 가문이 1461년 2월 17일 워릭을 세인트올번스에서 패퇴시키고 왕의 영지를 되찾았다(→ 세인트올번즈 전투).

워릭은 퇴각해 요크의 아들 에드워드의 군대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런던으로 무혈 입성했고 1461년 3월 4일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바로 그 달에 워릭과 에드워드는 요크셔의 타우튼에서 랭커스터 가문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에드워드 4세의 치세 초기 3년간 워릭은 실권을 휘둘렀으나 점차 왕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워릭은 에드워드를 프랑스 귀족과 결혼시켜 프랑스를 동맹 세력으로 확보하려 했지만, 왕은 1464년 5월 비밀리에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함으로써 그 계획을 무산시켰다. 에드워드가 자기 처의 친척을 고위관리직에 앉히려 하자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워릭은 왕의 형제로 클래런스 공작인 조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으며, 1469년 8월에 그들은 왕을 잠시 유폐시키고 왕비의 아버지와 형제 1명을 처형했다.

워릭은 1470년 3월 북부 잉글랜드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에드워드가 반란을 진압한 후 워릭과 클래런스를 공격하자 두 사람은 프랑스로 피신했다(1470. 4). 거기서 워릭은 옛날의 적이었던 헨리 6세의 왕비인 앙주의 마거릿과 화해했으며 1470년 9월 영국으로 돌아와 에드워드를 추방하고 헨리 6세를 복위시켰다. 이로써 워릭은 다시 영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1471년 3월 잉글랜드 북부에 상륙해 4월 14일 바넛 전투에서 워릭을 전사시켰다. 워릭의 경력은 P. M. 켄덜이 쓴 〈킹 메이커 워릭 Warwick the Kingmaker〉(1957)에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