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4세

에드워드 4세

다른 표기 언어 Edward IV
요약 테이블
출생 1442. 4. 28, 프랑스 루앙
사망 1483. 4. 9, 잉글랜드 웨스트민스터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장미전쟁이라고 알려진 요크가와 랭커스터가 사이의 분쟁에 관여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의 맏아들로, 1460년 리처드가 살해되자 군대를 모아 랭커스터가의 지지자들을 무찌르고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 사촌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이후 워릭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부르고뉴 공작 샤를과 프랑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반격에 나선 워릭은 랭커스터가 및 루이 11세와 손을 잡고 1470년 잉글랜드로 쳐들어왔다. 에드워드는 네덜란드로 도망갔다가 샤를의 도움으로 런던을 되찾고, 바넛 전투에서 워릭을 죽였다. 그 뒤 에드워드는 헨리 6세를 살해하고, 런던 공격을 물리친 후 권력을 지켰다. 1475년 이후 교역을 눈부시게 성장시켰으며, 이로 인해 관세 수입을 비롯한 다른 세입이 증가했다. 그는 유연한 왕실재무담당 관리를 통해 효율적인 회계감사를 추진했으며, 재위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법 시행 면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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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워릭과의 싸움
  3. 집권 후반기
에드워드 4세(Edward IV)
에드워드 4세(Edward IV)

개요

장미전쟁이라고 알려진 요크가와 랭커스터가 사이의 분쟁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와 웨스트멀런드 백작 랠프 네빌의 딸 시실리 사이의 살아 남은 아이 중 큰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리처드는 14세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두 아들의 계승자로 1450년대에는 헨리 6세에 대한 반란을 이끌었으며 1460년 지지자들에 의해 헨리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그해 12월 리처드가 살해되자 에드워드는 웨일스에서 군대를 모아 헨리의 지지자들(헨리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이었으므로 랭커스터가라고 불림)을 무찔렀다.

그는 1461년 6월 28일 런던에서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

워릭과의 싸움

당시 에드워드는 별로 믿음직하지 못했으며 싸움·술·여자·겉치레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사촌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덕분이었는데 그는 에드워드의 집권 초기에 영국에서 가장 큰 세력을 누렸다. 워릭은 1462~64년에 영국 북부에서 랭커스터가의 저항을 분쇄하고 영국의 외교를 맡았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잘생긴 외모와 매력 덕분에 많은 친구를 얻게 되자 독립을 주장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464년 5월 1일 아무런 지위도 없던 젊은 미망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몰래 결혼함으로써 자기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려던 워릭 백작 및 다른 요크가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

그후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가 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및 그녀의 다섯 남자 형제와 일곱 자매를 총애하여, 네빌 일가에 맞설 만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워릭 백작은 점차 궁정에서 모든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그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협상하고 있을 때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적인 부르고뉴와 동맹을 맺은(1467) 것을 밝혀 그를 망신시켰다. 1468년 7월 에드워드의 여동생 마거릿은 부르고뉴 공작 샤를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샤를과 에드워드는 합동으로 프랑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고무를 받아 반격에 나선 워릭은 1469년 7월 에드워드를 사로잡아 구금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에드워드의 지지자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그를 오랫동안 잡아둘 수가 없었다. 결국 에드워드는 그해 10월에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워릭은 프랑스로 달아나 랭커스터 가문 및 루이와 손을 잡고 1470년 9월 잉글랜드로 쳐들어왔다. 침공에 놀란 에드워드는 몇 사람의 충실한 지지자와 함께 그해 10월 네덜란드로 도망갔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도움을 받아 1471년 3월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을 되찾고, 4월 14일 바넛 전투에서 워릭을 죽였다. 같은 날 마거릿 왕비(헨리 6세의 아내)가 뒤늦게 외아들 웨일스 공 에드워드를 데리고 프랑스로부터 도싯에 상륙했다.

마거릿의 고문관들은 웨일스에서 지원을 얻으려 했으므로, 그녀가 웨일스에 도착하기 전에 그녀를 붙잡으려는 에드워드의 군대와 그녀의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몇 차례의 강행군 끝에(한 번에 약 64㎞ 이상씩 행군함) 그해 5월 4일 에드워드는 투크스베리에서 마거릿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이곳에서 그는 또 한 번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투크스베리 전투). 남아 있던 랭커스터 지도자들은 대부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거나 처형당했다.

그뒤 헨리를 살해하고(5. 21~22), 런던 공격을 물리친 후 에드워드는 평생 안전하게 지내게 되었다.

집권 후반기

그는 이제 다시 부르고뉴 공작과 힘을 합쳐 프랑스 침공 계획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1474년 철저한 준비를 마친 뒤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1475년 그는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로 일컬어지는 원정군을 이끌고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은 싸울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았으며 프랑스군은 강력히 저항하면서 그를 매수하려 했다. 결국 피키니 조약이 체결되어 에드워드는 프랑스에서 철수하는 대신 현금으로 금화 7만 5,000크라운을 받고 해마다 금화 5만 크라운을 받게 되었다.

이 돈 덕분에 그는 의회의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사라진 권리를 부활시키거나 법적 장치를 교묘하게 이용해 돈을 마련하는 데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프랑스·부르고뉴와의 통상조약 체결(각각 1475, 1468)과 한자동맹(1474)은 대외적인 평화 및 차츰 질서가 잡혀가던 국내 상황과 맞물려 1475년 이후 교역을 눈부시게 성장시켰으며 이로 인해 관세 수입을 비롯한 다른 세입이 증가했다.

그는 몸소 무역업자로 나서 자신과 외국 상인들의 배로 물건을 실어날랐다. 그는 왕실 영지에서 나오는 세입 재편성 작업을 시작했으며 소출을 높이는 방법을 실험하고 융통성 없는 재무부 대신에 유연한 왕실재무담당 관리를 통해 더욱 효율적인 회계감사를 추진했다. 이러한 여러 조치를 통해 그는 상당한 재산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개선한 재무 행정 가운데 몇 가지는 그의 뒤를 이은 리처드 3세와 헨리 7세에 의해 계속 실시·발전되었다.

그의 재위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법 시행 면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웨일스와 웨일스 경계 지방은 특히 말썽이 많은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 있던 왕실영지를 토대로 위원회를 만들어 아직 젖먹이였던 자신의 상속자 웨일스 공의 이름으로 활동하게 하고, 무질서를 억제할 수 있도록 왕실 전권대사를 임명했다. 이 위원회가 설치된 이래 웨일스와 그 경계지방은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그의 이런 행정적인 치적을 강조하고 있으며 당대와 튜더 왕조의 역사가들은 그의 재위 말년을 번영과 성공의 시대로 보았다.

그는 윈저에 세인트조지 성당을 다시 지었으며 금박으로 장식된 플랑드르어 필사본을 수집했다. 그는 인쇄업자 윌리엄 캑스턴의 친구이자 후원자였으며, 그가 수집한 서적들은 나중에 대영박물관이 자랑하는 '구(舊)왕립도서관'의 기틀이 되었다.

그의 난잡한 혼인 관계는 그가 죽은 뒤 글로스터의 리처드로 하여금 그의 결혼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으며, 결국 아들들을 망쳐놓았다.

그는 젊었을 때에는 남을 잘 믿고 거리낌 없는 성격이었으나 나이가 들면서 점차 의심 많은 사람으로 변해 1478년에는 예전에 자기에게 맞서 워릭 백작과 손을 잡았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를 처형했다. 1482년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통치자들과 화해하기 위해 피키니 조약과 연공(年貢) 상납을 거부했다. 에드워드는 다시 프랑스 침공을 계획했으나 그 계획을 실현하기 전에 병이 들어 겨우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483년 8월 런던 탑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드워드(에드워드 5세로 즉위)와 요크 공작 리처드 등 2명의 아들, 그리고 헨리 7세와 결혼한 큰딸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5명의 딸 등 모두 7명의 자녀를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사이에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