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런스

클래런스

다른 표기 언어 George Plantagenet, duke of Cla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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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49. 10. 21, 더블린
사망 1478. 2. 18,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잉글랜드의 귀족.

형 에드워드 4세(1461~70, 1471~83 재위)에 대항해 몇 가지 중요한 음모에 가담했다.

랭커스터 가문에 대항해 장미전쟁(1455~85)을 촉발시킨 요크 공작 리처드(1460 죽음)의 작은 아들이었다.

1461년 3월 에드워드 4세가 왕이 된 직후 클래런스 공작이 되었으며, 1462년에는 아일랜드의 국왕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468년경 과거에 비해 국왕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된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클래런스는 에드워드를 무시하고 백작의 딸인 이사벨과 결혼했다(1469. 7). 그뒤 1470년 3월 워릭과 함께 북부 잉글랜드의 무장 반란을 비밀리에 지원했다. 에드워드에게 반역행위가 발각되자, 그들은 프랑스로 달아났다가 9월에 돌아왔다. 에드워드가 유배된 뒤, 1461년에 폐위되었던 랭커스터가 출신의 무력한 왕 헨리 6세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클래런스는 곧 워릭의 정부 운영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1471년 3월 에드워드가 유배지에서 돌아오자, 이들 형제는 화해했으며 에드워드의 복위로 이끈 전투에서 싸운 공로로 클래런스는 1472년 워릭과 함께 솔즈베리의 백작이 되었다.

1476년 부인이 죽자, 클래런스는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와 결혼하려고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또 이 결혼에 반대하자, 화가 나서 다시 한번 형에 대항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클래런스가 왕위를 노리는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투옥되었으며, 1478년 1월 왕은 국회에서 자기 동생의 죄를 털어놓았다.

즉 국왕을 비방하고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상하 양원은 모두 사권 박탈 법안을 통과시키고, 뒤이어 선고된 사형이 1478년 2월 18일 런던 탑에서 비밀리에 집행되었다. 이 사건 직후 그가 백포도주 술독에 빠져죽었다는 소문이 들끓었다. 그에게는 솔즈베리 여백작 마거릿(1473~1541)과 워릭 백작 에드워드(1475~99) 등 2명의 자녀가 남아 있었다. 에드워드는 대부분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내다가 1499년 11월 참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