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7세

헨리 7세

다른 표기 언어 Henry VII 동의어 Henry Tudor
요약 테이블
출생 1457. 1. 28, 웨일스 펨브룩셔 펨브룩 성
사망 1509. 4. 21, 잉글랜드 서리 리치먼드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사이의 장미전쟁을 종식시켰으며 튜더 왕조를 세웠다.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마거릿보퍼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태어났다. 계승 가능한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헨리 튜더는 랭커스터가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헨리의 왕권은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헨리는 여러 곤경을 지혜롭게 넘겼다. 관세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헨리는 수출을 촉진하고 국내산업을 보호했으며, 보수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세심한 성격이 되었으며, 열정과 애정을 계산과 정책에 예속시키고, 항상 인내하고 경계하는 편이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요크가의 음모
  4. 대외정책
  5. 통치와 행정
  6. 성격
헨리 7세(Henry VII)
헨리 7세(Henry VII)

개요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 사이의 장미전쟁을 종식시켰으며 튜더 왕조를 세웠다.

초기생애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마거릿보퍼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아버지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웨일스의 향신이었던 오언 튜더와 헨리 5세의 과부였던 프랑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였다. 곤트의 존의 아이들은 그가 캐서린 스윈퍼드와 결혼하기 전에 태어났다. 헨리 4세는 이 아이들을 적출로 인정한 리처드 2세의 결정(1397)을 확인했으나 특별히 보퍼트가를 왕위계승의 가능성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헨리 6세의 독자인 에드워드가 1471년에 죽을 때까지, 또 보퍼트가에 남아 있는 2명의 친족과 헨리 6세 자신이 죽을 때까지 헨리 튜더의 왕위계승 주장은 약하고 중요성이 없었다.

계승 가능한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헨리 튜더는 랭커스터가의 혈통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헨리의 어머니는 헨리를 출산할 때 14세였으며 남편이 죽은 뒤 곧 재혼했기 때문에 헨리는 삼촌 펨브룩 백작 재스퍼 튜더에 의해 양육되었다. 투크스베리 전투(1471. 5)에서 랭커스터가가 패배했을 때 재스퍼는 어린 헨리를 데리고 브르타뉴 공작령으로 피신했다. 요크가의 세력이 굳건하게 확립된 것처럼 보여 헨리는 일생을 망명상태로 보내야 할 것 같았으나 리처드 3세의 찬탈(1483)로 요크가는 분열되었다.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의 반란을 지지하려고 랭커스터가 사람들을 뭉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이 헨리의 도움을 요구했을 때 처음으로 기회가 찾아왔다(장미전쟁). 그러나 반란은 헨리가 잉글랜드 땅에 도착하기 전에 분쇄되었다. 리처드 3세의 반대자들을 통일시키기 위해 헨리는 에드워드 4세의 맏딸인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요크파와 랭커스터파의 연합은 리처드 3세가 프랑스를 침공하려고 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원조에 힘입어 지속되었다. 1485년 헨리는 웨일스의 밀퍼드헤이븐에 상륙하여 런던으로 진격했다. 그의 계부였던 스탠리 공이 그에게로 탈주하는 데 크게 힘입어 그는 1485년 8월 22일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무찔렀다. 정당한 상속 자격과 전투를 통한 신의 심판을 들먹이며 그는 왕위를 요구했고 그해 10월 30일 왕관을 쓸 수 있었다. 11월초에는 의회의 승인을 획득했다. 그는 자신의 권리로 왕위를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킨 후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1486년 1월 18일 결혼했다.

요크가의 음모

헨리의 왕권은 결코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영향력 있던 요크가의 많은 사람들은 체제가 바뀜에 따라 재산을 박탈당하고 좌절에 빠졌다. 운명이 반전되는 경험을 많이 한 그였기에 보즈워스의 결판을 반드시 최종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요크가의 불만은 잉글랜드 북부와 아일랜드에서 동조를 얻었으며, 리처드 3세의 누이이며 버건디 공작의 미망인인 마거릿을 강력한 동맹세력으로 만들었다. 유럽의 모든 강국들은 헨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했으며 그에 대항하여 왕위계승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주려고 했다.

그 이후 왕은 재위기간말까지 음모로 골치를 썩어야 했다.

1486년 리처드 3세의 시종장 러벌 공의 첫 반란은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아니어서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듬해에 일어난 램버트 심널의 반란은 심각한 것이었다. 심널은 자신이 리처드 3세의 형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의 아들 워릭 백작 에드워드라고 주장하며 리처드 3세의 지명계승자인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과 많은 아일랜드의 족장들, 버건디의 마거릿에 의해 고용된 2,000명의 독일 용병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반군은 스토크(노팅엄셔의 뉴어크 근처 이스트스토크)에서의 싸움에서 고전한 끝에 패배했다(스토크 전투). 이 전투에서 정부군의 일부는 충성심이 의심스러웠는데 이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겪은 어려움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헨리는 심널이 얼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왕실의 식당에 고용했다.

그후 1491년에는 훨씬 심각한 위협이 나타났다. 마거릿은 퍼킨 워벡으로 하여금 에드워드 4세의 둘째 아들인 리처드의 역할을 하도록 사주했다. 한때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섭정이었던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1493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은 퍼킨은 1497년 햄프셔의 뷰리에서 포로가 되기 전에 영국을 3차례나 침공했다. 헨리의 또다른 걱정거리는 에드워드 4세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생존한 맏아들 서퍽 백작 에드먼드 드 라 폴의 반역이었다.

그는 1499년 네덜란드로 도망가서 막시밀리안의 원조를 받았다. 의심할 바 없이 헨리의 아들들의 죽음(1500, 1502)과 그 왕비의 죽음(1503)이 음모자들을 고무시켰을 것이다. 헨리가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서퍽 백작을 런던 탑에 가둔 1506년에 와서였다. 헨리가 죽었을 때 단 1명 살아남은 아들, 즉 헨리 8세는 반대 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대외정책

재위기간 초기에 브르타뉴 공작령이 프랑스에 편입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는 가운데 그는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의 반프랑스 전쟁에 이끌려갔다.

그러나 그는 불안정한 권력을 가진 가난한 왕에게 전쟁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492년 튜더 왕조의 승인과 상당한 연금을 조건으로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후 이탈리아에서의 모험에 프랑스가 매달림에 따라 평화적 관계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막시밀리안과 제임스 4세가 워벡에 대해 보여준 지지로 인해 네덜란드 및 스코틀랜드와는 날카로운 분쟁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네덜란드에 대해 잉글랜드가 갖는 경제적 중요성으로 인해 헨리는 막시밀리안네덜란드로 하여금 왕위요구자 워벡을 포기하도록 설득했고(1496) 더욱 자유로운 무역관계와 평화를 위한 협정을 체결하도록 유인했다. 스코틀랜드와의 오랜 적대적 전통은 극복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결국 1499년에 평화협정을 맺고 그뒤를 이어 1502년에 제임스 4세를 헨리의 딸 마거릿과 결혼시키기 위한 협정을 스코틀랜드와 체결했다.

제임스가 그 결혼에 동의하게 된 데는 아마도 아라곤의 캐서린이 1501년에 아서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 도착한 사실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첫째가는 강국의 지위에 올라선 스페인과의 결혼동맹은 튜더 왕가의 지위를 고양시켜주었다. 그리고 1501년에 스페인의 군주들이 결혼을 승낙했다는 사실은 유럽 강국들의 눈에는 튜더 체제의 더해가는 세력에 대한 찬사였다.

1502년 아서가 죽은 후 헨리는 캐서린이 자신의 둘째 아들 헨리(나중에 헨리 8세)와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그것은 그가 캐서린과 그녀의 지참금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잉글랜드의 지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재위기간 말기에 헨리는 자신의 지위에 대해 확신을 얻었기 때문에 결혼외교의 무모한 계획을 펼쳤다. 그러나 평생을 통해 얻은 조심성은 그로 하여금 전쟁에 가담하지 않게 했다. 따라서 전반적인 그의 대외정책이 후기의 그러한 일탈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외교를 왕조를 보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무역협정을 통해 잉글랜드의 교역을 촉진하기 위해 주어진 모든 기회를 포착해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국가를 번창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자신의 딸 메리를 카를로스 대공(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과 약혼시킬 수 있었다. 이들의 결혼은 당대 최고의 결혼이었다.

통치와 행정

국내에서 헨리는 주로 전통적인 방식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헨리는 에드워드 4세처럼 왕은 필요할 때 호사스러움과 힘을 모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부를 필요로 하는데, 부는 왕으로 하여금 의회와 채권자들에게 곤혹스럽게 의지하지 않아도 되게 만든다. 지불능력은 전쟁을 회피한다든지 행정의 효율성을 촉진한다든지 지출을 절약함으로, 그리고 수입을 증대시킴으로써 획득될 수 있었다. 관세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헨리는 수출을 촉진하고 국내산업을 보호했으며, 잉글랜드 상품은 잉글랜드 선박으로 운송하도록 하기 위해 유서 깊은 항해법이라는 방법으로 잉글랜드의 해운을 돕고자 노력했다.

또 존 캐벗과 그 아들의 탐험항해를 원조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 더욱 수익성 있었던 것은 합법적인 수수료·과태료·벌금 및 봉건적 부과금 같은 왕의 조세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체로 국왕 수입의 대부분을 완고한 전통에 얽매인 재무부로가 아니라 국왕 자신이 감독하고, 유능하고 활력에 찬 가신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왕실로 지불하게 하는 요크가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졌다.

헨리의 재정방식은 매우 효과적이고 무자비했기 때문에 뒤를 이은 계승자에게는 행운이었으며 재무대신에게는 증오의 유산이었다.

내란 이후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어서 헨리는 선조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전통적인 방식을 사용했다. 요크가의 왕들처럼 그는 자신이 직접 관장하는 대자문회의(법률가·성직자·小젠트리가 적극적인 성원이 되었음)를 이용했다. 성실법원 법정과 마찬가지로 진행되는 이 자문회의는 법적인 문제들(그러나 이전에 생각하던 것보다는 덜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의 통치기간말에 불법적인 무장병력을 보유 한다는 이유로 과해진 무거운 벌금들의 대부분은 왕좌법원과 순회재판소에 의해 부과된 것이었다. 자문회의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소송사건을 심리하고, 특별 법정을 세워 웨일스와 북부지방의 질서를 더 잘 유지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리고 더 많은 권한이 치안판사들에게 맡겨졌으나 왕은 무장종자제를 폐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군대의 상당부분을 무장종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또 사회는 그들을 높은 지위에 따르는 자연스런 부속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의 정부는 의회나 교회와의 관계에서처럼 보수적이었다.

성격

헨리는 젊은시절을 온통 역경으로 가득 찬 상황 속에서 종종 배반과 죽음의 위험, 가난 속에서 보냈다.

그 재위기간의 불안정함과 더불어 이러한 경험들로부터 그는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세심한 성격이 되었으며, 열정과 애정을 계산과 정책에 예속시키고, 항상 인내하고 경계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학문에 관심이 있었으며 붙임성이 있고 자애로웠으며, 유혈과 잔혹함을 혐오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필요성 앞에서는 무력해졌다. 현존하는 그의 초상화들과 묘사들은 조그마한 푸른 눈, 나쁜 치아, 엷은 흰색 머리를 가진 지치고 근심스러워 보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경험과 욕구들은 그를 탐욕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그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또 성공을 거두어감에 따라 한층 강렬해진 특징이었는데, 이 특징은 왕권이나 왕국 모두를 위해 시의적절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