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 왕가

요크 왕가

다른 표기 언어 House of York

요약 랭커스터가로부터 왕위를 빼앗아, 15세기에 3명의 잉글랜드 왕을 배출했으나 튜더 왕조에 패배해 왕위계승권을 넘겨주었다. 이 가문의 창시자는 에드먼드였으며 왕위계승권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은 요크 공작 3세였다. 그는 마거릿 왕비의 실정을 틈타 계승권을 주장하였고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를 받았다.
상원은 이를 받아들여 헨리 4세의 사후에 요크 공작 3세와 그 상속자들에게 왕위를 승계하도록 했으며 요크 공작 3세의 아들이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1471년 왕권을 회복한 후 에드워드 4세는 요크가 내부에 불신으로 갈등을 거듭해야 했다. 에드워드 7세가 요크가와 랭커스터 가문을 결합시키면서 튜더가의 왕위계승권 주장에 흡수됨으로써 사실상 요크가의 왕조로서의 역사는 끝이 났다.

랭커스터가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15세기에 에드워드 4세와 에드워드 5세 및 리처드 3세 등 3명의 잉글랜드 왕을 배출했으며, 뒤이어 튜더 왕조에 패배해 왕위계승권을 넘겨주었다.

요크 왕가
요크 왕가

이 가문의 창시자는 에드워드 3세의 다섯째 아들인 요크 공작 1세 랭리의 에드먼드(1341~1402)인데, 에드먼드와 그의 아들 요크 공작 2세 에드워드는 별로 출중한 인물이 못되었다. 자식이 없던 에드워드는 죽기 전에 조카인 리처드(그의 어머니는 에드워드 3세의 살아남은 둘째 아들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이었음)에게 공작위를 물려주었다.

요크 공작 3세가 된 리처드는 랭커스터가 출신의 헨리 6세에 맞서 왕위계승권을 처음으로 주장한 요크가의 인물이었다. 랭커스터가에서 3대째 왕권을 행사해오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요크 공작 3세가 주장한 왕위계승권 요구는 거부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주장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앙주 출신 마거릿 왕비와 그녀의 총신들의 실정 탓이었다.

그러나 요크 공작 3세의 왕권 주장은 혈통에 의거한 엄격한 원칙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그는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로 클래런스 공작인 라이오넬의 후손이었으며, 반면 랭커스터가는 라이오넬의 동생인 곤트의 존에서 비롯했다. 요크 공작 3세의 주장에서 약점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모계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이었는데, 사실 재판장 포테스큐는 이같은 사실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엄격한 법적 정통성 문제를 떠나 요크 공작 3세는 모계혈통 못지 않게 부계혈통을 통해서도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라는 사실로 인해 그의 왕위 주장이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수년 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헨리 6세 정부의 혈통적 취약성을 바로잡고자 노력을 기울이던 요크 공작 3세는 처음에는 무력을 사용했다가 나중에는 의회에서 자신의 왕위계승권이 정당한 것임을 역설했다. 상원은 그의 왕권주장이 무리한 것이 아님을 인정했으며, 대신 하나의 절충안으로 헨리 4세의 왕위를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그의 사후에 요크 공작 3세와 그 상속자들에게 왕위를 승계하도록 했다.

이같은 타협안은 요크 공작 3세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헨리 6세 자신도 동의했다. 그러나 앙주의 마거릿 왕비와 그 추종자들이 이에 반발했으며, 요크 공작 3세는 웨이크필드에서 이들과 맞서 전투를 벌이다 죽었다. 그러나 2개월쯤 지나 요크 공작 3세의 아들이 런던에서 왕으로 선포되어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곧이어 벌어진 타우턴에서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고 적대세력을 국외로 몰아냄으로써 대관식의 길을 열었다.

1471년 왕권을 회복한 후 에드워드 4세는 랭커스터가로부터의 도전을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요크가 내부에 불신의 씨앗이 이미 뿌려져 있었는데, 1478년 그의 동생 클래런스가 반역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클래런스의 처형은 런던 탑에서 비밀리에 행해졌지만 에드워드 4세 자신과 의회의 재가를 받은 것이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자 그의 큰 아들이 에드워드 5세로 즉위했으나, 2개월 반가량 명목상의 왕권을 유지하다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났다. 글로스터 공작은 리처드 3세로 즉위했는데,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인 요크 공작 리처드가 리처드 3세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한편 리처드 3세는 즉위 후 2년쯤 되었을 때 보즈워스필드에서 리치먼드의 튜더 백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튜더 백작은 에드워드 7세가 된 후 에드워드 4세의 장녀와 혼인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함으로써 요크가와 랭커스터 가문을 결합시켰다. 이때부터 요크가의 왕위주장은 튜더가의 왕위계승권 주장에 흡수됨으로써 사실상 요크가의 왕조로서의 역사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