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3세

리처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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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52. 10. 2, 잉글랜드 노샘프턴셔 포서링게이 성(城)
사망 1485. 8. 22, 레스터셔 보즈워스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1483년 6월 권력을 찬탈해 나라를 다스렸으나 2년 뒤에 전사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가와 문필가들은 그를 잔인무도한 악한으로 묘사한 반면 현대의 학자들은 그를 크나큰 잠재적 능력을 지닌 군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사악한 인물이라는 평판은 16세기의 정치적 악선전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리처드가 꼽추였다고 나와 있지만 초상화나 당대의 기록에서는 그같은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며 다만 그의 한 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솟아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기록은 있다

리처드 3세(Richard III)
리처드 3세(Richard III)

1483년 6월 권력을 찬탈해 나라를 다스렸으나 2년 뒤에 전사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가와 문필가들은 그를 잔인무도한 악한으로 묘사한 반면 현대의 학자들은 그를 크나큰 잠재적 능력을 지닌 군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사악한 인물이라는 평판은 16세기의 정치적 악선전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요크 공작 리처드(1460 죽음)의 막내아들로 1461년 큰형인 요크의 에드워드가 랭커스터 왕가의 허약한 군주 헨리 6세를 폐위시키고 에드워드 4세가 되어 왕권을 장악한 이후 글로스터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1470년 10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헨리 6세를 다시 권좌에 올려놓자 에드워드와 함께 쫓겨나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1471년 3월 에드워드와 같이 잉글랜드로 돌아온 리처드는 선봉부대를 이끌고 바넛과 튜크스베리에서 랭커스터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어 에드워드를 복위시켰다. 1471년 5월 21일 밤 런던 탑에서 일어난 헨리 6세 살해사건에도 개입한 듯하며 에드워드 왕은 그에게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높은 직위와 막대한 토지를 주었다.

1483년 4월 9일 에드워드 4세가 죽자 리처드는 에드워드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12세 된 국왕 에드워드 5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어린 왕을 조종하던 왕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이끄는 파벌과 갈등을 일으켰다. 리처드는 우드빌파의 세력을 깨기 위해 파벌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결국에는 처형했으며, 에드워드 5세와 그의 9세 된 동생을 연금시켰다. 런던의 설교사들은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무효이기 때문에 그 자녀들은 적법한 상속자가 아니며, 따라서 리처드가 에드워드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공표하도록 설득당했다.

6월 25일 의회에서 이러한 주장이 승인을 받아 리처드는 공식으로 국왕 자리에 올랐다.

1483년 8월 어린 두 왕자가 실종되자 항간에는 숙부인 리처드가 사람을 시켜 그들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도 크지만 또다른 유력한 용의자로 한때 리처드의 가까운 동료였던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퍼드가 있었다.

은밀하게 왕에게 등을 돌린 버킹엄이 그에게 불리한 평판을 만들기 위해 왕자들을 살해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1483년 10월 남부 잉글랜드에서 버킹엄이 일으킨 반란은 처음에는 리처드의 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했으나 이내 무너져 공작은 처형당했다. 이후 리처드는 과거의 불명예를 씻어내고 자신의 약한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국왕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전념해 통상을 장려하고 재정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귀족과 젠트리의 지지가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정작 그들은 리처드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기가 곤란하다고 느꼈다.

한편 리처드의 적들은 그의 경쟁자인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의 편에 모여들고 있었다.

헨리는 프랑스에 망명해서 살고 있던 랭커스터 가계의 왕위계승권자였다. 1485년 8월 7일 헨리는 군대를 이끌고 사우스웨일스에 상륙해 동쪽으로 진군하다가 8월 22일 보즈워스 평야에서 리처드와 전투를 벌였다. 리처드의 병력은 헨리보다 우세했으나 전투가 결정적인 고비에 이르자 국왕 편의 유력한 귀족 몇몇이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리처드는 도망가기를 거부하고 압도적인 적의 병력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다.

그뒤 헨리 튜더는 헨리 7세(1485~1509 재위)로 왕위에 올라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계승권을 통합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 Richard Ⅲ〉에서처럼 튜더 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줄곧 리처드가 악인으로 비난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는 리처드가 꼽추였다고 나와 있지만 초상화나 당대의 기록에서는 그같은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며 다만 그의 한 쪽 어깨가 다른 쪽보다 솟아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기록은 있다.

리처드에 대한 전기로는 P.M. 켄들이 쓴 〈리처드 3세 Richard the Third〉(1955)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