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로마

[ Rome ]

로마

세력’, ‘힘’, ‘강함’이란 뜻. B.C. 8세기경 작은 도시 국가로 창건된 로마는 6세기경인 B.C. 510년경 에트루리아인들(이탈리아 서부에 거하던 고대 민족)의 왕정에서 벗어나 인근의 민족들(라틴, 사비니 등)을 통합하고, 또 내부적으로는 귀족과 평민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여 공화정을 이룸으로써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연안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B.C. 1세기경 독재자 카이사르(B.C. 102-44년경)가 암살됨으로써 공화정은 혼란에 빠져들었고 그 뒤를 이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 해군을 격파함으로써(B.C. 31년경) 명실상부한 ‘로마의 평화시대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원로원으로부터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눅 2:1)라는 칭호를 받은 옥타비아누스(B.C. 27 - A.D. 14년경)는 제정 시대를 열면서 로마의 문화, 예술, 건축 등에 황금 시대를 가져왔다. → ‘로마 제국 판도’를 보라.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디베료(티베리우스, A.D. 14-37년경) 시대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후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A.D. 41-54년경), 네로(A.D. 54-68년경)에게로 황권이 이어졌는데, 글라우디오는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 자요, 네로는 사도 바울이 공정한 재판을 청구했던 자다. 그러나 바울은 네로의 박해 때 죽임당한 것으로 전해진다(A.D. 64년경). 그후 군인들에 의해 세 명의 황제들이 교체되었으며 네로 후임으로 황제가 된 자는 베스파시아누스(A.D. 69-79년경)이다. 그의 황위는 아들 디도(티투스, A.D. 79-81년경), 도미티아누스(A.D. 81-96년경)에게 차례로 계승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와 디도는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킨 자들이다(A.D. 70년). 또 도미티아누스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던 당시의 황제이다. 그리고 그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박해했던 황제로도 유명한데, 카타콤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그리고 A.D. 313년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거의 2세기 동안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쉼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A.D. 312년 황제가 된후 기독교에 대한 관용령을 선포했고,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허용하게 된다. 323년 동서 로마를 통합한 콘스탄티누스는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원래는 비잔티움이었으나 자기 이름을 딴 새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함)로 천도하고 그곳을 기독교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그 이후, 데오도시우스 황제 시기를 거친 후(395년경) 로마는 동서로 분열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천 년을 더 지속했지만, 서로마 제국은 A.D. 476년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로마는 교회가 그 빈 자리를 메우며 막강한 힘을 지닌 채 성장하게 되는데, 로마 가톨릭이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로마 제국의 풍요

B.C. 8세기경 도시 국가로 시작된 로마는 B.C. 6세기경에 공화정을 이루고 B.C. 1세기경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시대를 거치면서 지중해 연안과 중근동 일대의 막대한 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해상과 육상을 통해 로마로 유입되는 물품들을 통해 당시 로마의 권세와 영화가 얼마나 크고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로마 시의 관문에 해당하는 오스티아를 통해 들여오는 물품들로는 스페인에서 은과 철이, 멀리 중국에서 실크가, 인도에서 보석향료, 아프리카에서 계피가 해상을 통해 유입되었다. 또한 육상으로는 아라비아 등지에서 각종 보석과 화려한 옷감, 가축 등이 반입되었다.

당시 로마의 부귀 영화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했던지, 탈무드(Talmud)에는 ‘하늘에서 10개의 보화 주머니가 내려왔는데 그중 9개를 로마가 가졌고, 나머지 1개를 세상 나라들이 나눠가졌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당대 유명한 웅변가 아리스타테스(Aristates)는 “철마다 온 땅과 바다를 통해 온갖 산물이 로마로 들어왔다.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로마에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까지 로마의 영화를 극찬한 적이 있다. 심지어 네로 황제는 지방을 순찰할 때 1천여 대의 마차 호위를 받았으며, 말과 노새의 편자는 은으로 만들어졌고, 같은 옷을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일반 시민들 역시 은으로 만들어진 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겼고, 은으로 된 일상 제품들을 사용했는데, 노예들조차 은거울을 휴대할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의 노예 제도

고대 국가에서 노예의 대부분은 전쟁 포로로 이뤄졌다. 당시 동방의 노예들을 헬라 지역으로 팔아넘기는 시장으로 유명했던 ‘델로스’(Delos)에서는 하루에 무려 만 여 명의 노예들이 거래되었다고 한다(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이들 노예의 매매가는 건장한 장정의 경우 대략 120드라크마(1드라크마는 노동자 하루 품삯)였다. 로마의 한 원로는 당시 4천여 노예를 거느리기도 했다. 당시 로마 제국 내 노예는 약 6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는 자유민의 4배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한편, 노예는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다뤄졌다. 로마법에, 노예의 생명주인의 절대 권한에 속했고 심지어 황제조차도 그 권리를 침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주인에게 불복종할 경우 채찍질은 물론 심지어 십자가형이나 맹수의 밥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이렇듯 노예의 인격은 짐승보다 못하여 주인의 기분에 따라서는 하루에 수십 명의 노예가 죽어가기도 했다. 한 사례로, A.D. 60년경 로마의 원로 한 사람이 노예에 의해 피살되자 그 집 노예 400명을 무더기로 죽인 기록도 있다. 그러다 보니 노예로 인한 피해도 속출했다. 즉, 반역이나 살인, 불륜 등 크고 작은 범죄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로마는 노예로 지탱되었지만 동시에 노예 문제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 교회

헬라의 유대계 철학자인 필로(Philo, B.C. 20 - A.D. 45년경)는 바울 당시 로마에 거주했던 유대인들이 약 4만 명 정도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방 땅에 거하던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곤 했는데, 이때 사도 베드로의 설교와 복음을 듣고 회심한 뒤 로마에서 교회를 설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행 2:1, 37-41). 이렇게 보면 로마 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 설립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Tranquilus, A.D. 69-140년경)는 이미 49년경에 로마에 제법 큰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는 ‘크레스토스(그리스도) 소동’ 곧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발생한 분쟁으로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그후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는데,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55-115년경)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기독교인들이 순교당했다고 전한다.

평신도들에 의해 설립된 로마 교회는 네로 시대에 이르러는 순교당한 자들만도 무수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괄목상대하게 성장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쓴 로마서에서 문안하는 사람들만 보아도 그 세를 짐작할 수 있다(롬 1:8; 16장). → ‘로마 교회와 박해’, ‘로마의 군대 조직’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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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로의 서단(西端)인 로마로 이어지는 돌 포장길

오아시스로의 서단(西端)인 로마로 이어지는 돌 포장길 출처: 실크로드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