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양주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 9주(州)의 하나로서, 주치(州治)는 경상남도(慶尙南道) 양산시(梁山市)

일반정보

신라 문무왕 5년(665)에 하주(下州: 중심은 현재의 창녕)의 동쪽을 떼어 내어 양산(梁山)을 중심으로 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고, 신문왕 7년(687)에는 성을 쌓았다. 그 뒤 경덕왕 16년(757) 12월 9주(州)의 이름을 고칠 때 양주(良州)가 되었으나,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양주(梁州)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시대에는 경주(慶州)에 속하게 되었으며, 조선 태종때 양산군(梁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양주 본문 이미지 1

전문정보

양주(梁州)는 신라 양주(良州)의 고려시대 지명이다. 『삼국사기』 권45 열전5 박제상 및 『삼국유사』 기이2 나물왕․김제상조에 의거해 볼 때, 5세기 초에는 “삽량촌(歃良村)” 또는 “삽라군(歃羅郡)”으로 신라에 이미 복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두 지명의 행정단위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신라의 양주(良州), 즉 지금의 경남 양산시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村上四男, 1968)

양주(梁州)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즉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양주조에 따르면 “양주는 문무왕 5년, 인덕(麟德) 2년(665)에 상주(上州)․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 7년(687)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1,260보였다. 경덕왕이 이름을 양주(良州)로 고쳤다. 지금의 양주(梁州)이다.(文武王五年 麟德二年 割上州下州地 置歃良州 神文王七年 築城 周一千二百六十步 景德王改名良州 今梁州)”고 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 왕력에 보이는 “梁州二城”이라는 표현에 대해 왕력의 양주(梁州)는 문무왕 때 설치한 삽량주(歃良州)이며 경덕왕 때 양주(良州)로 개칭했던 곳이므로, 삽량성이 침략당한 이후 쌓은 두 개의 방어성을 왕력의 찬자(撰者)가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이강래, 2005) 또한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2년조, 5년조, 6년조의 기사에 따르면, 재위 2년(459)에 왜인들이 배 1백여 척을 동원하여 월성(月城)을 포위․공격하다가 신라군의 반격에 패퇴하였고, 재위 5년(462)에 왜인들이 활개성(活開城)을 격파하였으며, 다음 해에 다시 삽량성(歃良城)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는데, 신라는 이 해에 왜인들의 출몰지에 두 개의 방어성을 쌓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기사들을 근거로 왕력의 “기미년(己未年)”은 자비마립간 2년(459)에 해당하는 “기해년(己亥年)”의 오기로 보아야한다고도 하였다.(이강래, 2005)

경덕왕 16년(757) 개편 당시 양주(良州)는 12개 군(郡), 34개(縣)을 관장했으며, 주(州)에 직속하는 현은 하나였다. 주치(州治)는 현재의 양산(梁山)이다. 군부대로서 삼량화정(參良火停)과 만보당(萬步幢)을 두었으며, 장관으로 도독(都督), 차관으로 주조(州助), 그 밑에 장사(長史)를 각각 1명씩 두었다.

참고문헌

村上四男, 1968, 「新羅の歃良州(良州)について」『朝鮮學報』48.
이강래, 2005,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왕대력 비교 연구」『韓國史學報』21.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 慈悲麻立干 [金氏 父訥祗 母阿老夫人 一作次老夫人 實聖王之女 戊戌立 治二十一年 妃巴胡葛文王女 一作(未)叱希角干 一作□□角干女 始與吳國通 己未年 倭國兵來侵 始築明活城入避 來圍梁州(二)城 不克而還]
제20 자비마립간 [김씨이다. 아버지는 눌지이고 어머니는 아로부인 혹은 차로부인으로 실성왕의 딸이다. 무술에 왕위에 올라 21년간 다스렸다. 왕비는 파호갈문왕의 딸인데 혹은 미질희각간이라고도 한다. 또는 □□각간의 딸이라고 한다. 처음으로 오나라와 통교하였다. 기미에 왜국병이 내침하였다. 비로소 명활성을 지어 들어가 피하니 왜국병이 와서 양주(梁州) 2성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