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엄사

백엄사

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사찰

일반정보

『삼국유사』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따르면 백엄사는 그 건립연대를 알 수 없지만 그 위치는 초팔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의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백엄사가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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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伯嚴寺石塔舍利)조에 의하면 백엄사는 그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의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을 인용하여 백엄사는 초팔현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시 상좌인 간유가 39세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다시 다른 고기를 인용하여 백엄사가 신라시대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세워졌다고 하였다. 이후 백엄사를 거쳐간 승려에 대해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재건하여 주지를 하였는데 정축년(丁丑年, 917)에 양부화상은 세상을 떠났으며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이곳 백엄사에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직후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규칙의 내용은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한편 백엄사의 이름에 대해 세간에서는 엄흔, 백흔 두사람이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 두사람이 호법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기록 외에 백엄사에 관해 전하는 기록이 없어 그 정확한 위치와 현황을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의 백암리 일대가 백엄사 터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일대에 대하여 2006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와 함께 현장설명회가 이루어졌는데, 1차 발굴조사에서는 금동불입상과 청동제 사리구(舍利具), 금박편(金縛片), 막새 등 와전류(瓦塼類)와 청자편(靑磁片)이 출토되었고, 건물의 구조와 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초석(礎石)과 3동의 건물지(建物址), 기단석열(基壇石列), 배수로(排水路) 등이 드러났다.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진 조사였으나 확인된 유구와 주변지역의 방치된 건물부재(建物部材)와 석재(石材) 등으로 볼 때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현장설명회 자료에서는 해석상의 차이가 있겠으나 『삼국유사』 백엄사석탑사리조에서 인용된 고전에 따르면 북택청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절을 두었다고 하는데 1차 조사가 이루어진 폐사지 지역이 북택청이라고 하는 관청 또는 대단위 건물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곳인지 의문이며 금당(金堂)에 약사여래(藥師如來)와 5층 석탑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확인되지 않아 『삼국유사』에 보이는 백엄사라고 단정짓기 어렵다고 하였다.(경남문화재연구원, 2006)

2차 발굴에서는 건물지와 관련하여 축대 2기, 건물지 2동, 추정 문지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유구에 있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유구의 선후관계가 분명히 확인되고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연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백엄사지와 관련해서 『삼국유사』에서는 백엄사가 초팔현에 위치하며,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까지 존속하였던 사찰이므로 조사구역인 대양면 백암리가 초계현에 속했던 곳이고,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의 유물과 함께 석탑부재, 및 신라-고려시대에 속하는 와편이 다량 출토되어 조사된 건물지가 사지(寺址)임을 확인할 수 있어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되는 면이 없지 않다고 보고 있다.(경남문화재연구원, 2008)

현재 이곳 폐사지 내에는 보물 제381호로 지정된 합천백암리석등(陜川伯岩里石燈)과 시도유형문화재 제42호 대동사지석조여래좌상(大同寺址石造如來坐像)이 남아있다. 석등은 여덟 장의 잎이 달린 연꽃을 조각한 둥근 아래받침돌 위에 아무런 새김이 없는 8각의 긴 가운데기둥을 세웠다. 그 위로 마치 꽃봉오리같은 윗받침돌은 안에 얕은 홈을 파서 화사석(火舍石)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은 창을 내고 4면은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양각(陽刻)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이 있으며, 그 안쪽으로는 홈을 파서 화사석을 끼워 고정시키도록 되어 있다. 지붕돌의 경사면은 얇지만 각을 지고 있다. 귀퉁이에는 꽃조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깨어져 그 흔적만 남아있고, 꼭대기에는 8잎의 연꽃 문양조각만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신라 중대인 8세기 후반의 석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불은 8각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얼굴 부분의 마멸이 심하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다. 가슴은 넓게 트여 있고, 상체에서부터 흘러내린 옷주름은 무릎을 감싸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대좌는 상·중·하대를 갖추고 있는데, 상대에는 연꽃이 핀 모양을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을 조각하였다. 중대의 8면에는 각각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있는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져 있다. 근처에 있는 석등의 양식으로 볼 때 같은 시기에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관리국, 1977)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1977,『文化遺蹟總攬』,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경남문화재연구원, 2006,『陜川 伯岩里 石燈 周邊 整備事業敷地內 文化遺蹟 發掘調査 現場說明會 資料』.
경남문화재연구원, 2008, 『합천 백암리 석등 주변 정비사업부지내 문화유적 2차 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백엄사석탑사리)
伯嚴寺石塔舍利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 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 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 寺僧偘遊上座 年三十九云 寺之經始則不知 但古傳云 前代新羅時 北宅廳基捨置玆寺 中間久廢 去丙寅年中 沙木谷陽孚和尙 改造住持 丁丑遷化 乙酉年 曦陽山兢讓和尙來住十年 又乙未年 却返曦陽 時有神卓和尙 自南原白嵓藪 來入當院 如法住持 又咸雍元年十一月 當院住持得奧微定大師釋秀立 定院中常規十條 新竪五層石塔 眞身佛舍利四十二粒安邀 以私財立寶 追年供養條<第>一 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兩明神及近岳等三位前 立寶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 捨家爲寺 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金堂藥師前木鉢 月朔遞米條等 已下不錄

백엄사(伯嚴寺) 석탑 사리
개운(開運) 3년 병오(丙午, 946) 10월 29일 강주계(康州界) 임도대감(任道大監) 주첩(柱貼)에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지금의 초계(草溪)]에 있는데, 절의 스님 간유(偘遊) 상좌(上座)는 나이가 39세이다.”라고 하였다. 절을 짓기 시작한 때는 알 수 없으나, 다만 고전(古傳)에 이르기를, “전대(前代)인 신라시대에 북택(北宅)에서 집터를 희사하여 이 절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중간에 오랫동안 폐사되었는데, 지난 병인년(丙寅年, 906)에 사목곡(沙木谷)의 양부(陽孚) 화상(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를 하다가 정축년(丁丑年, 917)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乙酉年, 925)에 희양산(曦陽山) 긍양(兢讓) 화상이 와서 10년을 머물다가 다시 을미년(乙未年, 935)에 희양산으로 돌아갔다. 이때 신탁(神卓) 화상이 남원(南原) 백암수(白嵓藪)에서 와서 이 절에 들어가 법에 따라 주지를 하였다. 또한 함옹(咸雍) 원년(1065) 11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립(釋秀立)이 절에서 늘 지켜야할 규칙 10조를 정하고 새로 5층 석탑을 세워 진신 불사리 42낱을 가져다 봉안하였다. 사재(私財)로써 보(寶)를 만들어 해마다 공양할 것을 제일로 하고, 이 절에서 불법을 수호하던 존경받는 스님 엄흔(嚴欣)과 백흔(伯欣) 두 명신(明神)과 근악(近岳) 등 세분 앞으로 보를 세워 공양할 것[세간에 전하기를, 엄흔과 백흔 두 사람은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백엄(伯嚴)이라 하였고, 이에 호법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 나무 바리때에는 매월 초하루마다 쌀을 바꾸어 넣을 것 등이었다.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