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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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문학 > 국가 > 신라

기본정보

신라의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 집을 내놓아 세운 절

일반정보

신라의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 집을 내놓아 세운 절로, 경주시 도지동의 전(傳) 이거사지(移車寺址)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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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정보

『삼국유사』 권3 탑상4 유덕사(有德寺)조에 의하면, 신라의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 집을 내놓아 유덕사(有德寺)를 세웠으며, 먼 후손인 고려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撝)가 유덕의 진영(眞影)을 걸어 모시고 또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유덕사는 최씨 문중에 원당(願堂)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세우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으로 독실하게 불교에 심취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는 불교신자가 만년에 거사로서 승려에 못지않은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한 수양처의 마련인 동시에 내세를 위해 삶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후손에 의해 명복을 비는 원당 안에 진영이 봉안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이 신라 관인들의 보편적인 원당 성립되는 경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한기문, 1998) 최언위(崔彦撝, 868-944)는 나말여초의 왕조교체라는 격변기를 체험한 신라 6두품 지식인으로, 신라와 고려 두 조정에서 문한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러한 최언위가 유덕의 비를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가문은 경주 부근에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김보경, 2008)

조선 정조 23년(1799)에 전국의 절에 대한 사정을 조사하여 기록한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증산(甑山)에도 유덕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보이기는 하나, 일제강점기에는 경주시 도지동의 전(傳) 이거사지(移車寺址)가 유덕사로 알려져 있었다.(이구열, 1996)

한편, 도지동의 절터는 성덕왕릉과의 방향으로 미루어 이거사(移車寺)로 추정하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성덕왕 35년(736)조에 의하면, 왕이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현재 이 절터에는 석탑의 부재가 남아있는데, 상층 및 하층기단부의 탱주가 모두 2개, 옥개석의 받침이 5단, 2층 옥개석의 아랫부분에 사리공의 일부가 마련된 점 등에서 8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이근직, 2006)

현재 유덕사 석가여래좌상으로 알려져 있는 불상은 청와대에 있다. 이 불상은 1913년 무렵, 데라우치(寺內) 조선 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小平)라는 일본인 집 정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오히라는 데라우치가 이 불상을 탐낸다고 생각하여, 즉시 지금의 남산 밑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이 불상은 1927년에 경복궁에 새 총독관저(지금의 청와대)가 신축되자 이곳으로 옮겨졌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枕流閣) 뒤의 샘터 위에 안치되어 있다.(이구열, 1996)
한편, 1935년에 발간된 『조선보물고적도록(朝鮮寶物古蹟圖錄)』에 의하여 이 불상의 원 위치를 경주 남산 삼릉계의 한 계곡으로 보면서, 1939년 총독 관사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신축될 때 왜성대로부터 이전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현재 높이 약 130cm의 이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지금의 대통령 관저 자리에 있던 것을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현재의 위치인 북악산 기슭으로 이전하였으며, 보호각은 제5공화국(1981-1988) 초에 지었다고 한다.(대통령경호실, 2007)

이 석조여래좌상은 경주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양식의 불상으로, 흉부기 발달하여 딱 벌어진 체격과 온후한 안면(顔面), 굵은 삼도(三道), 유려한 법의(法衣), 자연스럽게 내린 팔과 항마촉지인(降魔觸指印)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기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신영훈, 1961) 눈 꼬리는 약간 올라갔으나 아래를 보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있었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현재 하대석과 중대석은 사라지고 상대석만 남은 상태다. 팔과 어깨, 등허리 부분에 파손된 부위가 있었으나 2007년에 보존처리하였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연대에 대해서는 8세기 중엽에 만든 석굴암 본존불로 대표되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다소 경직된 신체, 옷 주름, 사각형 대좌의 형태 등으로 볼 때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대통령경호실, 2007)

참고문헌

신영훈, 1961, 「靑瓦臺 石造釋迦如來坐像」『考古美術』2-12.
이구열, 1996,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된 유덕사터 석불좌상」『한국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한기문, 1998, 「官人의 願堂과 그 機能」『高麗寺院의 構造와 機能』, 민족사.
이근직, 2006, 『신라 왕릉의 기원과 변천』, 영남대학교 박사논문.
대통령경호실, 2007,「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트렌드미디어.
김보경, 2008, 「비문에 새겨진 최언위의 삶, 사유, 문학」『고전과 해석』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유덕사)
有德寺
新羅大夫角干崔有德 捨私第爲寺 以有德名之 遠孫三韓功臣崔彦撝 掛安眞影 仍有碑云

유덕사
신라의 대부각간(大夫角干) 최유덕(崔有德)이 자기의 집을 내놓아 절로 삼고 이름을 유덕(有德)이라고 하였다. (그의) 먼 후손인 삼한공신(三韓功臣) 최언위(崔彦撝)는 (유덕의) 진영(眞影)을 걸어 모시고 또 비를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