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동 유적

황성동 유적

[ 慶州 隍城洞 遺蹟 ]

지역 경주
황성동 유적 본문 이미지 1

널무덤(木棺墓) 유적과 집자리 및 제철유구가 발굴된 복합유적으로, 널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 유림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유적은 한국전력공사의 전설주 매설공사시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수습발굴을 시행했다.

널무덤은 장방형(長方形)의 평면형태를 가진 것으로 폭에 비해 길이가 긴 것이 특징이다. 규모는 길이 4.15m, 폭 1.2m 정도이고, 깊이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 서벽쪽은 15~20㎝, 동벽쪽이 2~4㎝ 정도로 묘광의 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유물은 대부분 묘광의 서벽쪽에서 출토되었다. 서벽쪽 가까이에서 유개대부단경호(有蓋臺附短頸壺) 1점과 타날문원저호(打捺文圓底壺) 2점이 일렬로 출토되었는데, 전선주 공사시 출토된 2개체분인 대부단경호, 타날문원저호도 이들 토기와 함께 놓여져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단경호와 원저호들의 동쪽으로 30㎝가량 떨어져서 노형토기(爐形土器) 2점이 출토되었는데 1점은 대형이고, 나머지 1점은 소형이다. 이 앞으로 50㎝ 가량 떨어져서 고배 2점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는 호형토기, 노형토기, 고배 등으로 구분하여 기종별로 부장한 것이 특색이다. 토기 외에 널 중간부위에서는 무경삼각형역자식 철촉이 1점 출토되었다.

보고자는 인근의 경주 조양동 고분군과 부산 노포동 고분군과의 고분 구조 비교와 부장된 토기의 기종과 형식을 기반으로 3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집자리 및 제철유구가 발굴된 유적 중 집자리는 이 지역에 건설되는 주공아파트 건설부지에 대한 유적조사의 일환으로 1990년에 1차, 1991년 2차의 발굴로 조사된 유적이다. 이 유적은 행정구역상 경주 황성동 907-2번지 일대로서 경주 분지의 전체로 보면 서북편에 해당된다. 이 유적에서 서쪽으로 70m 떨어져 경주 서천(四川)이 흐르고 이 강 방향을 따라 동서 강 안에 충적대지가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철기시대 집자리를 비롯하여 삼국시대 제철유구(製鐵遺構)가 발굴되었다. 1·2차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철기시대의 집자리는 원형 또는 타원형의 집자리가 18기, 방형 집자리가 2기로 모두 20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이들 집자리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앞 시기의 것은 원형 내지 타원형의 움집자리(竪穴住居址)에 지상가옥이 1기 있고, 뒷 시기의 집자리는 말각방형(抹角方形) 내지는 방형(方形)의 집자리이다.

집자리 내부에는 전면 또는 벽 근처 일부에 목탄화된 목재와 소토덩어리가 섞여 있는 것이 있으며 이것은 지붕이나 벽체 시설이 화재로 타면서 무너져 내려 쌓인 것으로 추정되며 바닥은 아무런 시설 없이 점토바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움 깊이는 상부 어깨선 부분이 경작 등에 의해 훼손되어 확실치 않지만 현재의 깊이로 보아 대체로 20~25㎝가 대부분이며 특별한 출입시설은 없다. 내부시설 중 화덕은 집자리 자체가 파괴된 3기를 제외하고는 15기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대부분 동벽쪽이나 서벽쪽에 붙어서 위치하고 특별한 시설 없이 바닥을 약간 파고 그대로 불을 피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석기류, 토기류, 철기류로 나눌 수 있는데, 석기류는 간돌도끼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숫돌이 출토되었으며, 토기에는 무문토기와 함께 와질계의 긴독, 주머니호, 항아리, 손잡이항아리 등이 있고, 철기류에는 쇠화살촉, 쇠낫, 쇠손칼(鐵刀子), 단조쇠도끼, 쇠끌 등이 있다.

황성동 철·철기 생산유구(隍城洞 鐵·鐵器生産遺構)는 철광석이나 기타 철원료를 환원시켜 철을 생산하는 공정이 이루어지는 노(爐)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제철유적이라고 하기 어려우나, 생철(生鐵)을 용해하여 주조쇠도끼를 주조했던 용해로(鎔解爐)와 저탄소의 환원철을 단조(鍛造)하여 중간소재나 철기를 생산하는 단야로(鍛冶爐) 등이 발견되었으므로 1차로 얻어진 철원료를 가지고 한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철·철기생산이 이루어졌던 유적임에는 틀림없다.

황성동 유적에서 노출된 용해로적(鎔解爐跡)은 대부분 길이 약 3.0~2.5m 내외의 방형 혹은 장방형의 움을 약 30~40㎝ 가량 판 뒤, 움 바닥과 벽을 점토로 보강하고 그 내부에 타원형에 가까운 노(爐)를 설치한 것이다. 노는 보통 점토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지름은 0.6~0.7m 내외이다. 이들 용해로 내부에서는 다량의 유리질 철재(鐵滓)와 목탄이 발견되었고 송풍관의 잔해(送風管片)들과 주조쇠도끼(鑄造鐵斧)의 거푸집(鎔范) 파편이 다량 발견되었다. 단야로적(鍛冶爐跡)은 보통 지름 0.5m 내외의 평면 원형의 움에 점토를 발라 만들었다. 노의 바닥면에는 철재가 많이 붙어 있었고 내부토에서도 철재 및 소토, 송풍관편 등이 발견되었다. 그 가까이에는 단야할 때 사용한 받침모루 돌이 놓여 있었고, 주변에서는 일정 간격의 기둥구멍(柱孔)이 발견된 것을 보면 간단한 움막과 같은 시설을 만들어 사용한 듯하다. 그리고 유적 내에 일정한 공간을 마련하여 쓰지 못하게 된 주조쇠도끼의 거푸집을 폐기하였는데 그 양이 막대하다.

이 황성동 제철유적은 국내 최초로 발견되었고, 또 가장 오래된 철·철기생산 관련유적으로 중요하다. 발굴조사 결과 확실한 제련작업이 이루어진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환원된 철괴를 녹여 주조쇠도끼를 만들거나 단조하여 단조철기를 제작했던 유구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신라의 철생산과 관련된 중요 조업기지임이 틀림없다. 유적의 연대는 출토된 토기 등으로 보아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삼국시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慶州隍城洞鐵器製作遺構(李榮勳, 第34回 全國歷史學大會發表要旨, 1991년)
  • 慶州 隍城洞遺蹟 第一次 發掘調査 槪報(隍城洞遺蹟發掘調査團, 嶺南考古學 8, 嶺南考古學會, 1991년)
  • 慶州 隍城洞 遺蹟發掘調査報告(李健茂 外, 國立博物館古蹟調査報告 17, 1985년)